61세 브래드 피트가 64세 조지 클루니를 "할배"라 비아냥대는 '울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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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오동진의 아웃 오브 넷플릭스
애플TV+ '울프스 (Wolfs)'
애플TV+ '울프스 (Wolfs)'
애플TV+의 신작 ‘울프스’에서 1963년생 브래드 피트는 1960년생인 조지 클루니에게 자꾸 할배라고 부르며 비아냥댄다. 물론 브래드 피트는 여전히 젊으면서도 중후해 보인다. 조지 클루니는 요즘 들어 부쩍 늙어 보인다. 그런 브래드 피트를 마주하며 조지 클루니는 영화 속에서가 아니고 진짜로 그를 한 대 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해 한다. 그러나 그런 두 사람도 별수가 없다. 사건의 주요 단서인 페이저(삐삐)가 울리자, 그 숫자를 읽느라 둘 다 품에서 뭔가를 동시에 꺼낸다. 바로 돋보기이다!!
‘울프스’는 사건의 내용상 사실은 상당히 무거운 갱스터 누아르가 됐을 법한 이야기이다. 처음에 소니 픽처스가 이 작품을 기획했을 때는 아마도 그런 방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애플TV+로 넘어오면서 코미디로 바뀌었다. 물론 슬랩스틱 형, 포복절도하는 코미디까지는 아니다. 아이러니의 충돌. 그 안에서 비집듯이 튀어나오는 쓴웃음 같은 유머의 코미디물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배우의 무게감만큼 누아르 분위기였으면 더 좋았겠다 싶었지만, 영화가 끝나갈 때쯤에는 이 영화가 무엇을 기본으로 만들었는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도 ‘울프스’는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는 단 ‘한 편’의 영화이다. 얼마 만인가. 8부작, 10부작, 12부작 하는 드라마가 아닌 영화 '한 편만을' OTT로 보는 것이. 그것도 할리우드 대형 스타가 나오는 작품을.
‘울프스’는 두 가지의 영화를 떠오르게 한다. 조지 로이 힐이 1969년에 만든 ‘내일을 향해 쏴라’이다. 이전 영화에서의 두 명의 갱을 여기서는 두 명의 해결사로 바꿔 놓았다. 과거 영화에서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의 ‘티키타카’, 그 리듬을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의 ‘케미’가 베끼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특히 ‘울프스’의 마지막 엔딩 장면은 완벽하게 ‘내일을 향해 쏴라’의 마지막 장면을 가져온 것이다. 이건 일종의 오마주이다. 또 한 가지 생각나는 영화는 1987년 리차드 도너 감독이 만들고 멜 깁슨, 대니 글로버가 주연한 ‘리썰 웨폰’시리즈이다. 특히 ‘울프스’는 조 페시가 나왔던 ‘리썰 웨폰2’의 3인 구조 드라마를 가져왔다. ‘리썰 웨폰2’에서 두 형사 마틴 릭스(멜 깁슨)와 로저(대니 글로버)는 ‘똘마니’ 마약 밀매자 리오(조 페시)를 앞세워 범죄 조직을 급습하려 한다. 이번 ‘울프스’에서의 잭(조지 클루니)과 닉(브래드 피트) 역시 친구의 부탁으로 카르텔 조직의 마약을 배달하려다 말썽에 휘말린 대학생(오스틴 에이브럼스)을 이용한다. 잭과 닉이 운전석 앞에 앉고 뒷좌석에 문제의 대학생이 앉아 가면서 대화를 주고받는 샷(shot)은 과거 마틴 릭스와 로저, 리오의 쓰리 샷과 흡사하다. 사실 이런 장면은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법이나 촬영에 있어 공식 같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울프스’는 친숙한 할리우드 장르라는 얘기이고 그만큼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울프스’는 배우의 이름값으로는 매우 뛰어난 수작이 나와야 했었지만,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서 기대가 높았지만, 그보다는 한 단계 낮은,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흥미로운 작품으로 나왔다. 그냥 보고 즐기기에 알맞은 작품이다. 그런데도 누아르 같은 분위기, 서스펜스 스릴러의 상당한 느낌을 주는 데도 모자라지는 않는다. 마치 엘모어 레너드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1998년 작 ‘조지 클루니의 표적’을 연상케도 한다. 그만큼 얘기에 얘기를 얹히고 단단한 밧줄처럼 이중 삼중으로 사건의 배후를 꼬아 놓았다. 그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진짜 재미이다. 그러니까 두 해결사가 풀어야 할 사건이 핵심이 아니라 그 사건을 만든 장본인을 찾는 것이 핵심이고, 잭과 닉을 왜 현장에 불러냈고, 또 누가 불러냈느냐란 점에 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두 해결사의 고용주는 과연 누구인가. 그 점을 생각하면서 이 영화를 봐야 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뉴욕으로 보이는) 대도시의 지방 검사가 벌인 하룻밤의 일탈이다. 마가렛이라는 이름의, 이 여자(에이미 라이언)는 중년의 나이로 어느 날 무슨 모임인지 회의인지 참석하러 갔다가 호텔 바에 갔고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젊은 남자를 만났는데 그 길로 방을 잡고 엘리베이터로 올라간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마가렛은 극구 부인하지만, 호스트로 보이는 이 남자애가 호텔 방에서 여자와 즐긴 후 갑자기 미쳐 날뛰더니(호텔 방 화장실에서 약을 한 것이 분명하겠지만) 침대에서 떨어져 유리 테이블을 박살 낸 후 숨을 멈춘 것이다. 여자는 당황했고 언젠가 자신보다 고위급인 누군가가 가르쳐 준 전화번호로 해결사를 부른다. 잭, 곧 조지 클루니이다. 잭은 빠른 시간 안에 호텔에 도착한 후 익숙하게 사태 수습에 나선다. 여자는 고위직이고 스캔들이 새어 나가면 안 되는 위치에 있는 데다 범죄 없는 도시를 슬로건으로 새로운 법질서, 그에 따른 법률을 만들려고 하는 참이다. (이런 얘기는 영화 속에서 택시 광고 문구 하나로 스치듯 지나간다. 영리한 시나리오다) 여기까지도 좋다. 더 큰 문제는 잭이 수습 중인 이 호텔 방에 또 다른 해결사인 닉(브래드 피트)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당장 두 사람 간에 주도권 경쟁이 벌어진다. 여기까지도 좋다. 마가렛을 안전하게 집으로 보낸 후 호스트로 보이는 남자아이의 시신을 ‘포장해서’ 지하 주차장으로 옮겨 잭의 트렁크에 옮기는 데 성공했으나 막상 이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난다는 것이 진짜 문제이다. 자, 이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기밀 유지를 위해 죽일 것인가. 죽여야만 하는가. 신종 마약은 맥박을 잠시 중단시킬 만큼 치명적인 환각 효과를 가져온다는 설정이다. 이때부터 사건은 도무지 어디로 갈지 짐작하기 어렵게 된다. 곧바로 크로아티아 계열 갱단이 나오고 더 잔혹한 알바니아 갱단과 무시무시한 대결 구도가 나오는데 잭과 닉 모두, 이들과의 일전은 피해 가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안 되는 게 인생이자, 할리우드 영화의 법칙이다. 난사(亂射)의 총알 발레 장면이 이어진다. 크로아티아 갱단 두목 딸의 결혼식에 잠입한 잭과 닉, 그리고 대학생 마약 배달부이자 마가렛의 호스트였던 아이는 축하연 파티에서 갱단 ‘오빠’들의 동구권 유대인의 전통 폴카 군무에 휘말린다. 과정은 코믹하지만, 결과는 참담한 죽음일 수 있는 상황이다. 아이러니한 서스펜스 장면이다. 둘은 다른 갱단 남자들과 어깨를 두르고 춤을 추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지만 동시에 한시라도 빨리 이 춤사위에서 빠져나와야지만 살아날 수가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둘은 사람들과 춤을 춘다. ‘울프스’는 제목처럼 (고독한) 늑대 같은 해결사의 이미지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사건에 휘말려 끙끙대는 중년 나이의 해결사 둘의 안쓰러운 일상과 그 애환을 담아내는 데 주력한다. 이 영화는 그래서 다소 ‘웃픈’ 면이 있고 또 오히려 그런 점 등이 이 영화를 대중적이고 쉬운 영화로 만들어 낸 셈이다. 그런 등등 때문에 이 영화를 어떤 사람들은 좋아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싫어할 수도 있겠다. 폴카 장면, 결혼식 피로연 장면은 1980년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디어 헌터’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1972년 작 ‘대부1’에서 슬쩍 베껴 온 느낌을 준다. 할리우드에서 갱단의 주체는 이제 더 이상 이탈리아나 러시아, 남미 콜롬비아 카르텔이 아니다. 알바니아와 크로아티아 같은 발칸반도 국가들의 이민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알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거리낌 없이 사람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끔찍한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세상이 변했다. 범죄 조직도 변했다. 사법 시스템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어두운 곳에서 은밀히 원하는 해결사를 원한다. 근데 그 해결사들도 변했다. 그 해결사 역을 맡는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 같은 배우도 변했다. 세상은 다 변했으며 끊임없이 변해 간다. 그 변화를 느끼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 ‘울프스’에 대한 올바른 해석의 키 포인트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울프스’는 두 가지의 영화를 떠오르게 한다. 조지 로이 힐이 1969년에 만든 ‘내일을 향해 쏴라’이다. 이전 영화에서의 두 명의 갱을 여기서는 두 명의 해결사로 바꿔 놓았다. 과거 영화에서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의 ‘티키타카’, 그 리듬을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의 ‘케미’가 베끼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특히 ‘울프스’의 마지막 엔딩 장면은 완벽하게 ‘내일을 향해 쏴라’의 마지막 장면을 가져온 것이다. 이건 일종의 오마주이다. 또 한 가지 생각나는 영화는 1987년 리차드 도너 감독이 만들고 멜 깁슨, 대니 글로버가 주연한 ‘리썰 웨폰’시리즈이다. 특히 ‘울프스’는 조 페시가 나왔던 ‘리썰 웨폰2’의 3인 구조 드라마를 가져왔다. ‘리썰 웨폰2’에서 두 형사 마틴 릭스(멜 깁슨)와 로저(대니 글로버)는 ‘똘마니’ 마약 밀매자 리오(조 페시)를 앞세워 범죄 조직을 급습하려 한다. 이번 ‘울프스’에서의 잭(조지 클루니)과 닉(브래드 피트) 역시 친구의 부탁으로 카르텔 조직의 마약을 배달하려다 말썽에 휘말린 대학생(오스틴 에이브럼스)을 이용한다. 잭과 닉이 운전석 앞에 앉고 뒷좌석에 문제의 대학생이 앉아 가면서 대화를 주고받는 샷(shot)은 과거 마틴 릭스와 로저, 리오의 쓰리 샷과 흡사하다. 사실 이런 장면은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법이나 촬영에 있어 공식 같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울프스’는 친숙한 할리우드 장르라는 얘기이고 그만큼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울프스’는 배우의 이름값으로는 매우 뛰어난 수작이 나와야 했었지만,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서 기대가 높았지만, 그보다는 한 단계 낮은,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흥미로운 작품으로 나왔다. 그냥 보고 즐기기에 알맞은 작품이다. 그런데도 누아르 같은 분위기, 서스펜스 스릴러의 상당한 느낌을 주는 데도 모자라지는 않는다. 마치 엘모어 레너드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1998년 작 ‘조지 클루니의 표적’을 연상케도 한다. 그만큼 얘기에 얘기를 얹히고 단단한 밧줄처럼 이중 삼중으로 사건의 배후를 꼬아 놓았다. 그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진짜 재미이다. 그러니까 두 해결사가 풀어야 할 사건이 핵심이 아니라 그 사건을 만든 장본인을 찾는 것이 핵심이고, 잭과 닉을 왜 현장에 불러냈고, 또 누가 불러냈느냐란 점에 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두 해결사의 고용주는 과연 누구인가. 그 점을 생각하면서 이 영화를 봐야 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뉴욕으로 보이는) 대도시의 지방 검사가 벌인 하룻밤의 일탈이다. 마가렛이라는 이름의, 이 여자(에이미 라이언)는 중년의 나이로 어느 날 무슨 모임인지 회의인지 참석하러 갔다가 호텔 바에 갔고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젊은 남자를 만났는데 그 길로 방을 잡고 엘리베이터로 올라간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마가렛은 극구 부인하지만, 호스트로 보이는 이 남자애가 호텔 방에서 여자와 즐긴 후 갑자기 미쳐 날뛰더니(호텔 방 화장실에서 약을 한 것이 분명하겠지만) 침대에서 떨어져 유리 테이블을 박살 낸 후 숨을 멈춘 것이다. 여자는 당황했고 언젠가 자신보다 고위급인 누군가가 가르쳐 준 전화번호로 해결사를 부른다. 잭, 곧 조지 클루니이다. 잭은 빠른 시간 안에 호텔에 도착한 후 익숙하게 사태 수습에 나선다. 여자는 고위직이고 스캔들이 새어 나가면 안 되는 위치에 있는 데다 범죄 없는 도시를 슬로건으로 새로운 법질서, 그에 따른 법률을 만들려고 하는 참이다. (이런 얘기는 영화 속에서 택시 광고 문구 하나로 스치듯 지나간다. 영리한 시나리오다) 여기까지도 좋다. 더 큰 문제는 잭이 수습 중인 이 호텔 방에 또 다른 해결사인 닉(브래드 피트)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당장 두 사람 간에 주도권 경쟁이 벌어진다. 여기까지도 좋다. 마가렛을 안전하게 집으로 보낸 후 호스트로 보이는 남자아이의 시신을 ‘포장해서’ 지하 주차장으로 옮겨 잭의 트렁크에 옮기는 데 성공했으나 막상 이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난다는 것이 진짜 문제이다. 자, 이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기밀 유지를 위해 죽일 것인가. 죽여야만 하는가. 신종 마약은 맥박을 잠시 중단시킬 만큼 치명적인 환각 효과를 가져온다는 설정이다. 이때부터 사건은 도무지 어디로 갈지 짐작하기 어렵게 된다. 곧바로 크로아티아 계열 갱단이 나오고 더 잔혹한 알바니아 갱단과 무시무시한 대결 구도가 나오는데 잭과 닉 모두, 이들과의 일전은 피해 가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안 되는 게 인생이자, 할리우드 영화의 법칙이다. 난사(亂射)의 총알 발레 장면이 이어진다. 크로아티아 갱단 두목 딸의 결혼식에 잠입한 잭과 닉, 그리고 대학생 마약 배달부이자 마가렛의 호스트였던 아이는 축하연 파티에서 갱단 ‘오빠’들의 동구권 유대인의 전통 폴카 군무에 휘말린다. 과정은 코믹하지만, 결과는 참담한 죽음일 수 있는 상황이다. 아이러니한 서스펜스 장면이다. 둘은 다른 갱단 남자들과 어깨를 두르고 춤을 추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지만 동시에 한시라도 빨리 이 춤사위에서 빠져나와야지만 살아날 수가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둘은 사람들과 춤을 춘다. ‘울프스’는 제목처럼 (고독한) 늑대 같은 해결사의 이미지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사건에 휘말려 끙끙대는 중년 나이의 해결사 둘의 안쓰러운 일상과 그 애환을 담아내는 데 주력한다. 이 영화는 그래서 다소 ‘웃픈’ 면이 있고 또 오히려 그런 점 등이 이 영화를 대중적이고 쉬운 영화로 만들어 낸 셈이다. 그런 등등 때문에 이 영화를 어떤 사람들은 좋아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싫어할 수도 있겠다. 폴카 장면, 결혼식 피로연 장면은 1980년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디어 헌터’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1972년 작 ‘대부1’에서 슬쩍 베껴 온 느낌을 준다. 할리우드에서 갱단의 주체는 이제 더 이상 이탈리아나 러시아, 남미 콜롬비아 카르텔이 아니다. 알바니아와 크로아티아 같은 발칸반도 국가들의 이민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알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거리낌 없이 사람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끔찍한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세상이 변했다. 범죄 조직도 변했다. 사법 시스템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어두운 곳에서 은밀히 원하는 해결사를 원한다. 근데 그 해결사들도 변했다. 그 해결사 역을 맡는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 같은 배우도 변했다. 세상은 다 변했으며 끊임없이 변해 간다. 그 변화를 느끼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 ‘울프스’에 대한 올바른 해석의 키 포인트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