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산업은행이 지난달 17조원 규모의 ‘반도체 금융 지원 프로그램’을 만지작거릴 때만 해도 말이 많았다. 반도체업계 ‘큰손’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이 자금을 쓸 정도로 한도가 풀릴지, 시장 조달 금리보다 어느 정도 쌀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산은의 저리 대출이 연 3.5%로 금리 경쟁력이 높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대출 한도와 금리 수준을 타진하고 나섰다.

○하이닉스, 저리 대출로 첨단반도체 투자

[단독] 반도체 실탄 확보 나선 삼성·하이닉스…"AI칩 전쟁서 승리할 것"
SK하이닉스는 산은에서 최대 3조원을 조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SK하이닉스는 인공지능(AI)용 메모리 반도체인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엔비디아에 독점 공급하며 AI 반도체 시장의 강자로 떠올랐다. 물꼬가 터진 만큼 글로벌 AI 전쟁의 승자 지위를 얻기 위해선 추가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2위 AI가속기 업체 AMD 등에서도 납품 요청이 밀려들고 있어서다. 야당까지 나서 반도체산업 지원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는 만큼 ‘물 들어올 때 노를 젓겠다’는 판단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1분기 말 기준 SK하이닉스의 현금 보유액(단기금융상품 포함)은 8조2000억원이다. 치열한 경쟁을 위해선 연간 10조원에 달하는 시설 투자액이 필요하다.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가 금융회사 등에서 25조원을 차입한 상황을 감안하면 저리 정책금융은 가물에 단비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는 산은에서 빌린 자금을 첨단 반도체 투자에 사용할 방침이다. SK하이닉스는 경기 용인에서 120조원 이상을 투자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사업을 추진 중이다. 미국 인디애나에서도 40억달러(약 5조3000억원)를 투입해 AI 메모리 반도체에 특화한 첨단 패키징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AI 메모리 반도체에서 1등을 굳히기 위해 막대한 투자와 연구개발(R&D) 비용을 투입해 ‘초격차’를 유지한다는 전략이다.

배터리(SK온) 투자로 자금 수요가 많아진 SK그룹 입장에서도 SK하이닉스가 저리로 자금을 조달하면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에 큰 보탬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삼성, 대출 한도·금리 타진

삼성전자도 최근 산은에 대출 한도와 금리 수준을 알아봤다. 산은은 정부의 반도체 지원 방침에 따라 최대 5조원가량 공급이 가능하다고 밝혔다는 후문이다.

삼성전자가 대출 한도를 알아본 이유는 금리 경쟁력(연 3.5%)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2월 자회사인 삼성디스플레이에서 21조9900억원을 빌리며 약정한 연 4.6%보다 크게 낮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로서는 계열사에서 돈을 끌어오는 것보다 더 낮은 금리로 신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셈이다.

삼성전자가 산은에서 빌리기로 하면 대규모 설비 투자를 위해 중·장기 대출을 받는 것은 2004년 이후 20년 만이다. ‘자존심’(무차입 경영) 대신 ‘실리’(저리 대출)를 챙겨 투자를 확대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다.

삼성전자가 외부 자금 조달 여부를 들여다본 것은 돈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삼성전자는 91조원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작년 말 기준)을 보유하고 있다. 싼 금리의 자금을 일부 조달해 자금 운용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봐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대출 한도와 금리 수준을 알아본 것은 맞지만 신청 여부는 아직 확정된 바 없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2022년부터 경기 평택에 6개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총사업 규모가 200조원에 달한다. 해외에서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달러(약 23조원)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다.

박의명/강현우 기자 uimy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