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한미약품 사태 '유감'
국내 제약업계 10위권에 머물던 한미약품이 본격 도약한 것은 2000년부터다. 의사가 약을 처방하면 약사는 처방전에 따라 단순 조제하도록 한 의약분업 시대에 제대로 편승한 덕분이었다. 남들보다 한발 빠르게 제네릭(복제약)을 출시하고 약국 위주이던 영업망을 병원 중심으로 다시 짜면서 승승장구했다.

단순히 제네릭에만 의존하지도 않았다. 외국의 오리지널약 성분을 그대로 쓰면서 제형이나 화학구조를 조금 바꿔 특허를 피한 개량신약 시대를 처음 열었다. 한미약품이 지금껏 내놓은 개량신약은 100여 개에 이른다. ‘개량신약의 명가’로 불리는 배경이다.

K바이오에 기술수출 공식 전수

개량신약으로 큰돈을 번 한미약품은 신약 개발에 도전했다. 1989년 글로벌 제약사 로슈와 600만달러 규모의 기술수출 계약을 맺었다. 국내 제약업계 최초의 기술수출이었다. 2011년 아테넥스, 2012년 스펙트럼에 신약 후보물질을 넘겼다. 2015년에는 6개 글로벌 제약사와 8건의 기술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2016년, 2020년, 2021년에도 기술수출 기록을 추가했다. 계약 규모는 총 12조원에 이른다.

한미약품의 잇단 기술수출은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에 방향타가 됐다. 수천억, 수조원이 소요되는 임상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우리 기업들의 현실을 고려해 글로벌 기업에 신약 후보물질을 넘기는 기술수출이 성장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이 모든 건 4년 전 작고한 한미약품 창업주 임성기 회장이 일궈놓은 업적이다.

그는 실패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혁신의 시작점이라는 철학도 일깨웠다. 얀센에서 반환받은 비만·당뇨 신약 후보물질을 다시 개발해 미국 머크(MSD)에 1조원 규모로 기술수출한 게 대표적이다. 공교롭게도 임 회장이 영면에 든 다음 날 계약이 성사됐다. 당시 한미약품 직원은 물론 제약업계 종사자들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임 회장의 마지막 유훈을 받아들였다.

가족 분쟁에 선대 회장 유산 '흔들'

안타깝게도 임 회장의 유산은 오래가지 못할 것 같다. 가족간 경영권 분쟁이 불과 두 달 만에 재연될 조짐을 보여서다. 지난 3월 정기주총에서 모녀와 장·차남이 서로 맞서 싸우더니 이번엔 차남이 모친을 공동대표 자리에서 밀어냈다. 가족 공동경영은 물 건너가 버렸다. 일각에서는 장남과 차남마저 갈라서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이럴 경우 한미약품 경영권 다툼은 또다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다.

오너 가족 간 경영권 분쟁의 후유증은 간단치 않다. 신약 개발을 이끌어온 연구개발 수장들이 대거 회사를 떠났다. 기술수출 소식도 뚝 끊겼다. 한미약품의 신약 개발 경쟁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가 나온 지 오래다. 우리 제약·바이오산업에는 엄청난 악재가 아닐 수 없다.

가족 간 갈등을 두고 이런저런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회사 공중분해다. 주가 급락으로 오너 가족이 대출 담보로 맡긴 주식이 강제 매각되는 상황이 빚어질 수 있어서다. 사모펀드 매각 시나리오에 대한 평가도 부정적이다. 이익을 더 내려고 연구개발 투자를 줄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한미약품의 미래를 밝게 보는 시각이 많지 않다는 얘기다. 어쩌면 해답은 하나뿐일지도 모르겠다. 제약회사 ‘업’의 본질인 신약 개발이다. 임 회장의 유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