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보다 저급해" X등급 받고도 아카데미 석권한 최초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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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효정의 금지된 영화 욕망의 기록
영화 <미드나잇 카우보이>
영화 <미드나잇 카우보이>
화려한 웨스턴 부츠에 프릴이 잔뜩 달린 카우보이 자켓을 입은 한 남자가 버스 안에서 연신 사람들을 지켜보며 싱글벙글 웃음을 짓는다. 한껏 들뜬 남자는 ‘팔자를 고치러’ 뉴욕으로 향하는 중이다. 그곳에서 돈 많은 중년 여자들에게 몸을 팔아 큰돈을 버는 것이 이 남자의 유일무이한 꿈이다.
존 슐레진저의 <미드나잇 카우보이>는 텍사스에서 접시닦이로 살아가던 ‘조 벅’ (존 보이트)이 뉴욕에서 노숙자이자 사기꾼인 ‘랫죠’ (더스틴 호프만)를 만나 펼쳐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메이저 스튜디오 중심의 올드 할리우드 시대가 저물고 젊은 감독들의 대거 등장으로 새롭게 떠 오른 뉴 할리우드 시네마의 대표작인 <미드나잇 카우보이>는 남성의 성 노동, 동성애의 재현, 수위 높은 섹스신으로 X 등급 (등급 외 상영관에서만 상영이 가능한 등급, 포르노 영화나 문제적인 장면이 포함되는 영화들에게 부여된다)을 받기도 했다. 영화는 성 노동자로 출세하기를 원하는 조 벅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카메라가 주로 응시하는 것은 그의 영업 행위가 아닌 혹은 그의 영업 행위를 통한 자본주의의 극단을 상징하는 뉴욕 맨해튼에서 가장 후미지고 어두운 곳, 즉 빈민가와 슬럼, 그리고 곧 허물어질 빌딩 속 노숙자의 방이다. 따라서 조 벅이 성 노동자로 성공을 하는지 아닌지는 영화를 보기 위한 작은 명제에 지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미드나잇 카우보이>는 가진 것은 건장한 육체와 수려한 외모뿐인 조 벅이 그의 ‘젊음’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속할 수 있는 공간이 미국 사회에서 가장 낮고 천한 지하 세계뿐이라는 암울한 사실을 암시한다. 이는 영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베트남 반전운동과 민권운동의 시위 현장과 무관하지 않다. 조 벅과 랫죠는 이 운동들과 전혀 무관한 인물인 듯 보이지만, 이들은 분명 시대의 변화를 종용하는 새로운 세대의 구성원이고, 이들의 끊임없는 추락은 세상의 변화를 저지하는 세대와 그들의 이치에 의한 결과인 것이다. 조 벅은 여자 고객을 소개시켜주겠다는 랫죠의 모략(?)에 말려들어 가진 돈을 모두 그에게 주고 빈털터리가 된다. 한 허름한 다이너에서 우연히 랫죠를 만났을 때 그는 준 돈을 요구하지만 랫죠에게 남은 것은 동전 몇 개와 극심한 폐렴뿐이다.
랫죠의 폐허 아파트에서 함께 살면서 그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낀 조 벅은 간신히 첫 영업에 성공해 번 돈으로 그의 약과 식료품을 구한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있는 랫죠에게 따뜻한 수프도, 기침약도 더 이상 아무런 효과가 없는 듯하다. 랫죠는 암울하고 싸늘한 뉴욕을 떠나 햇살이 넘치는 플로리다로 그를 데려다주기를 조 벅에게 부탁한다. 플로리다로 떠나는 여정에서 조 벅은 처음으로 카우보이 차림을 모두 벗어버린다. 그에게는 이제 정복할 땅도, 싸워 이겨야 할 총잡이도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로 갈아입고 마이애미에서의 새로운 꿈을 꾼다. 아름다운 미녀들과 야자수가 빼곡한 해변가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조 벅과 렛죠의 환상은 달리는 버스 안에서 줄곧 이어진다. 버스가 한참을 달리고, 어느새부턴가 랫죠는 말이 없다. 버스는 마이애미에 거의 도착했지만 렛죠의 시선은 더 이상 마이애미도, 뉴욕도 향하지 않은 채 생기를 잃은 상태다.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서막인 버스 시퀀스와 수미쌍관을 이루는 엔딩의 버스 시퀀스는 의미심장하다. 이들은 늘 어딘가로부터 어딘가를 향해 가지만 어디에도 갈 수가 없다. 마치 <졸업>의 엔딩에서 벤자민과 일레인이 일레인의 정략결혼으로부터 성공적으로 탈출해 버스에 올라타지만 곧 우울한 현실을 자각하는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듯, 조 벅과 렛죠의 버스 역시 그들의 꿈에 당도하지 못한 채 달리는 길 어딘가에서 결말을 맞는 것이다. 뉴 할리우드의 영화들은 ‘젊음’ 그리고 젊음을 가진 자들을 새로운 기표로 재현했다. 그것은 새롭지만 희망적이거나 역동적인 것이 아닌, 염세적이고 회의적인 주체로 혁명에 한복판에 선 미국 사회의 저변을 대표하는 존재였다. <미드나잇 카우보이>는 영화의 ‘선정성’으로 먼저 화제가 된 작품이지만 그 선정성은 사회적 도발이자, 문화의 혁명을 선도하는 행위였음이 분명하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
존 슐레진저의 <미드나잇 카우보이>는 텍사스에서 접시닦이로 살아가던 ‘조 벅’ (존 보이트)이 뉴욕에서 노숙자이자 사기꾼인 ‘랫죠’ (더스틴 호프만)를 만나 펼쳐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메이저 스튜디오 중심의 올드 할리우드 시대가 저물고 젊은 감독들의 대거 등장으로 새롭게 떠 오른 뉴 할리우드 시네마의 대표작인 <미드나잇 카우보이>는 남성의 성 노동, 동성애의 재현, 수위 높은 섹스신으로 X 등급 (등급 외 상영관에서만 상영이 가능한 등급, 포르노 영화나 문제적인 장면이 포함되는 영화들에게 부여된다)을 받기도 했다. 영화는 성 노동자로 출세하기를 원하는 조 벅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카메라가 주로 응시하는 것은 그의 영업 행위가 아닌 혹은 그의 영업 행위를 통한 자본주의의 극단을 상징하는 뉴욕 맨해튼에서 가장 후미지고 어두운 곳, 즉 빈민가와 슬럼, 그리고 곧 허물어질 빌딩 속 노숙자의 방이다. 따라서 조 벅이 성 노동자로 성공을 하는지 아닌지는 영화를 보기 위한 작은 명제에 지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미드나잇 카우보이>는 가진 것은 건장한 육체와 수려한 외모뿐인 조 벅이 그의 ‘젊음’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속할 수 있는 공간이 미국 사회에서 가장 낮고 천한 지하 세계뿐이라는 암울한 사실을 암시한다. 이는 영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베트남 반전운동과 민권운동의 시위 현장과 무관하지 않다. 조 벅과 랫죠는 이 운동들과 전혀 무관한 인물인 듯 보이지만, 이들은 분명 시대의 변화를 종용하는 새로운 세대의 구성원이고, 이들의 끊임없는 추락은 세상의 변화를 저지하는 세대와 그들의 이치에 의한 결과인 것이다. 조 벅은 여자 고객을 소개시켜주겠다는 랫죠의 모략(?)에 말려들어 가진 돈을 모두 그에게 주고 빈털터리가 된다. 한 허름한 다이너에서 우연히 랫죠를 만났을 때 그는 준 돈을 요구하지만 랫죠에게 남은 것은 동전 몇 개와 극심한 폐렴뿐이다.
랫죠의 폐허 아파트에서 함께 살면서 그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낀 조 벅은 간신히 첫 영업에 성공해 번 돈으로 그의 약과 식료품을 구한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있는 랫죠에게 따뜻한 수프도, 기침약도 더 이상 아무런 효과가 없는 듯하다. 랫죠는 암울하고 싸늘한 뉴욕을 떠나 햇살이 넘치는 플로리다로 그를 데려다주기를 조 벅에게 부탁한다. 플로리다로 떠나는 여정에서 조 벅은 처음으로 카우보이 차림을 모두 벗어버린다. 그에게는 이제 정복할 땅도, 싸워 이겨야 할 총잡이도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로 갈아입고 마이애미에서의 새로운 꿈을 꾼다. 아름다운 미녀들과 야자수가 빼곡한 해변가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조 벅과 렛죠의 환상은 달리는 버스 안에서 줄곧 이어진다. 버스가 한참을 달리고, 어느새부턴가 랫죠는 말이 없다. 버스는 마이애미에 거의 도착했지만 렛죠의 시선은 더 이상 마이애미도, 뉴욕도 향하지 않은 채 생기를 잃은 상태다.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서막인 버스 시퀀스와 수미쌍관을 이루는 엔딩의 버스 시퀀스는 의미심장하다. 이들은 늘 어딘가로부터 어딘가를 향해 가지만 어디에도 갈 수가 없다. 마치 <졸업>의 엔딩에서 벤자민과 일레인이 일레인의 정략결혼으로부터 성공적으로 탈출해 버스에 올라타지만 곧 우울한 현실을 자각하는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듯, 조 벅과 렛죠의 버스 역시 그들의 꿈에 당도하지 못한 채 달리는 길 어딘가에서 결말을 맞는 것이다. 뉴 할리우드의 영화들은 ‘젊음’ 그리고 젊음을 가진 자들을 새로운 기표로 재현했다. 그것은 새롭지만 희망적이거나 역동적인 것이 아닌, 염세적이고 회의적인 주체로 혁명에 한복판에 선 미국 사회의 저변을 대표하는 존재였다. <미드나잇 카우보이>는 영화의 ‘선정성’으로 먼저 화제가 된 작품이지만 그 선정성은 사회적 도발이자, 문화의 혁명을 선도하는 행위였음이 분명하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