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성, '강제 퇴거' 연작. /중구문화재단 제공
이대성, '강제 퇴거' 연작. /중구문화재단 제공
이대성, 강제 퇴거 연작. /중구문화재단 제공
이대성, 강제 퇴거 연작. /중구문화재단 제공
‘역사상 가장 뜨거운 해’라는 이명이 붙은 지난해 지구의 평균기온은 14.98℃.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이 숫자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온난화를 넘어 펄펄 끓는 열대화 시대를 맞이했다는 뉴스도, ‘지구의 허파’ 아마존 열대우림이 복원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질 수 있다는 경고도 마찬가지다. 겪어보지 못한 환경위기는 어렴풋할 뿐이고, 눈앞의 일상은 평온하기 때문. 한여름 더위가 짜증스럽긴 해도, 에어컨을 틀면 금세 땀을 식힐 수 있는 안락한 생활 속에선 기후붕괴로 터전을 잃고 생존의 갈림길에 선 사람과 동물의 처연한 현실이 와닿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사진 한 장을 보면 어떨까. 여기 ‘강제 퇴거’라는 이름이 붙은 디오라마(배경에 하나의 장면을 더 만드는 배치) 형식의 작품이 걸렸다. 전통복식을 한 나이 든 몽골인 둘이 초원이 그려진 배경판 앞에 서서 현대적인 옷을 입은 한 가족을 안쓰럽게 바라본다. 가족이 있는 자리엔 온통 모래뿐이다.

이들이 발을 딛고 선 장소는 몽골 초원이다. 다만 나이 든 이들의 초원은 되찾을 수 없는 과거의 초록 우거진 곳이고, 젊은이들의 초원은 사막화로 생기를 잃은 땅이란 차이가 있을 뿐이다. 14.98℃란 수치보다 기후위기가 명징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작품을 찍은 사진가 이대성은 이를 “인간의 손이 빚은 비극적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한다.
잉마르 비욘 놀팅, Eviction 07, 2023. /중구문화재단 제공
잉마르 비욘 놀팅, Eviction 07, 2023. /중구문화재단 제공
기후위기로 한국 인구의 40%에 달하는 사람들이 난민으로 내몰리고, 자연의 퍼즐 조각인 동·식물이 멸종위기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을 극적으로 담아낸 사진작가들의 전시회가 서울 한복판에서 열렸다. 서울 중구문화재단이 서울 흥인동 충무아트센터의 미술전시 공간인 갤러리신당 재개관을 기념해 기획한 특별 사진전 ‘Confession to the Earth’다. ‘지구에 대한 고해성사’로 풀이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오랜 시간 환경문제를 예술로 풀어내는 데 천착해온 한국, 독일, 미국, 영국 사진가 5명의 작품 100여 점이 걸렸다.

프로젝트를 총괄한 석재현 예술감독은 “사진 매체가 가진 기록성을 통해 대중과의 접점을 확장하고, 환경문제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하자는 기획”이라고 했다. “현재의 지구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안타깝고 치열한 고백”이라고 전시를 설명한 그는 “오늘의 작은 고백이 푸른 별 지구에서 다시 살아가기 위한 커다란 희망의 고백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닉 브랜드, SINK - RISE 연작, 'Ben-and-his-father', Fiji, 2023. /중구문화재단 제공
닉 브랜드, SINK - RISE 연작, 'Ben-and-his-father', Fiji, 2023. /중구문화재단 제공
전시는 마이클 잭슨 등 유명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다 사진작가로 전향한 닉 브랜트의 작품으로 시작한다. 주로 아프리카 대자연과 야생동물을 필름에 담아온 그는 ‘The Day May Break’ 연작을 통해 인간과 코뿔소 등 동물의 지치고 무기력한 모습을 흑백으로 선보인다. 피지섬 연안에서 수중 촬영한 ‘SINK/RISE’ 연작은 해수면 상승으로 터전이 잠길 위기에 처한 원주민들이 육지에서 밀려나 바다 밑바닥까지 가라앉게 된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영국 사진가 맨디 바커의 사진도 묘하다. 플라스틱 잔해들이 전 세계 바다를 떠다니는 사진들이 과소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1992년 ‘에버그린 에버 로렐’호에서 바다로 떨어진 2만8800개의 거북이 장난감이 16년간 북태평양 환류를 떠돌며 진짜 바다거북을 내몬 ‘SOUP Turtle’ 등 사진이 마치 우주 속 풍경 같다. 대표적인 해양 쓰레기인 낡은 축구공들을 찍은 사진 앞엔 작가가 강원도 속초 앞바다에서 발견한 쓰레기 축구공이 놓여 있다.
맨디 바커, '바다를 뒤덮은 존재' 연작. /중구문화재단 제공
맨디 바커, '바다를 뒤덮은 존재' 연작. /중구문화재단 제공
맨디 바커, 바다를 뒤덮은 존재 연작. /유승목 기자
맨디 바커, 바다를 뒤덮은 존재 연작. /유승목 기자
같은 독일 출신 작가로 환경 문제를 다뤄 왔으면서도, 톰 헤겐과 잉마르 비욘 놀팅의 사진은 느낌이 사뭇 다르다. 인터내셔널 포토그래피 어워드 등을 수상한 톰 헤겐은 항공사진을 통해 아름다운 지구 곳곳을 탐험하고, 획득하고, 지배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담은 ‘인류가 빚어낸 추상’ 연작을 선보였다. 반면 잉마르 비욘 놀팅은 사진은 갈탄 채굴장이 있는 독일 뤼체라트 광산에서 환경운동가와 기업·정부의 치열한 싸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톰 헤겐이 무분별한 개발로 망가지는 자연을 추상화 같은 사진으로 선보였다면, 놀팅은 보다 구체적인 회화처럼 느껴다.
톰 헤겐, Illegal gold mining near Palangka Raya, Borneo, Indonesia, 2023 /중구문화재단 제공
톰 헤겐, Illegal gold mining near Palangka Raya, Borneo, Indonesia, 2023 /중구문화재단 제공
작품마다 ‘예술도 세상을 바꾸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외침이 들린다. 작품에 담긴 지구의 모습은 슬프지만, 여전히 장엄하고 아름답다는 점에서 고발의 목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세현 중구문화재단 사장은 “고고한 예술을 보여주는 건 다른 국공립 미술관에 넘기고 앞으로 대중 친화적 예술을 보여주는 데 갤러리 역할을 충실히 다할 것”이라고 했다. 전시는 9월 8일까지.
좌측부터 잉마르 비욘 놀팅, 맨디 바커, 조세현 중구문화재단 사장, 석재현 예술감독, 톰 헤겐, 이대성. /중구문화재단 제공
좌측부터 잉마르 비욘 놀팅, 맨디 바커, 조세현 중구문화재단 사장, 석재현 예술감독, 톰 헤겐, 이대성. /중구문화재단 제공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