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재정·통화정책 vs 수급대책
물가안정과 연계한 통화신용정책은 한국은행법 제1조에 명시돼 있다. ‘정책’이지만 재정 운용과 법의 집행을 담당하는 정부의 정책과는 결이 다르다. 양쪽 모두 국가기관이지만 한은과 행정부는 한 몸이어서도 안 된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그만큼 중요하다. 국회 동의를 받아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임명하지만 정부와 사법부가 별개의 헌법기관인 것과 비슷하다. 정책의 최종 소비자인 국민 입장에선 다를 수 있다. 기획재정부든 한은이든 국가기관들이 제 입장만 고수하지 말고 잘 협력해 경제를 발전시키길 바랄 뿐이다. 통화신용정책·재정정책·금융감독정책이 큰 틀에서 협력·공조해야 하는 이유다.

지난주 이창용 한은 총재가 정부에 훈수처럼 한마디 했다. “통화·재정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구조적 문제를 고민해봐야 한다.” 사과 값 등 농수산물 가격 안정에 대해 그는 ‘수입’을 근본적 문제 해결 방안으로 제시했다. 생산량이 줄어들 때는 유통 개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견해도 덧붙였다. 고물가 문제는 그대로 돈의 가치에 관한 문제이니 사과 가격에 대한 한은의 걱정은 괜한 게 아니다.

장기 저성장에 경기 침체가 계속되자 확장적 재정정책과 저금리의 완화적 통화정책에 대한 기대가 커진다. 경제전문가라는 이들까지 쉽게 그런 주장을 내놓는다. 하지만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 나라 곳간이 그럴 형편도 못 된다. 지난해 1월 한은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찔끔 올린 뒤 15개월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 통화정책 역시 한계에 봉착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총재가 ‘구조적 문제의 근본대책’으로 수입을 거론했다. 달리 해석하면 수급정책을 제대로 펴자는 얘기가 될 것이다. 개방 경제로 사는 한국 입장에서 수입은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수요를 합리적으로 억누를 수 없다면 이렇게라도 공급을 확대해야 물가가 잡힌다. 부동산 등과 달리 사과에는 가수요도 없다. 금융·세제를 총동원해 수요를 억지로 막고 정상적 공급조차 틀어막으면 어떻게 되는지 지난 정부 집값 대책이 잘 보여줬다. 실수요를 인정하고 공급의 길을 잘 터주는 게 합리적 정책이다.

허원순 수석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