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주 ‘무제’. 종이에 콜라주, 색연필, 먹, 수채, 155×107㎝, 1980년대 중반.  /성곡미술관 제공
김홍주 ‘무제’. 종이에 콜라주, 색연필, 먹, 수채, 155×107㎝, 1980년대 중반. /성곡미술관 제공
드로잉은 회화의 기초다. 수세기 전부터 존재한 가장 단순하면서 효율적인 그리기 행위이자 그리는 이의 자유분방한 생각과 즉흥적 감각을 즉시 투영할 수 있는 수단이다. 하지만 그 본질은 언제나 ‘부수적인 것’에 머물렀다. 회화를 위한 밑그림 혹은 지지대의 역할만 주어졌을 뿐이다. 드로잉은 그 자체로는 늘 ‘미생(未生)’이었던 셈이다.

원로 화가 김홍주(79)는 드로잉에 ‘완생(完生)’을 부여했다. 반세기 동안 회화와 드로잉의 경계에 머물며 캔버스에 선과 점으로만 그려낸 그의 작품은 ‘회화로서의 드로잉’ 또는 ‘드로잉 같은 회화’라고 부를 만하다. ‘그림은 어떻게 그려지는가’에 대한 사유가 이뤄낸 결과다.

서울 신문로2가 성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김홍주의 드로잉’은 드로잉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전시다. 1970년대부터 약 55년간 천착해 온 드로잉으로 완성한 작품 60여 점이 걸렸다.

작품이 하나 같이 액자 없이 걸려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이수균 성곡미술관 부관장은 “수성 물감으로 수겹을 쌓아 올린 김홍주의 작업은 있는 그대로를 볼 때 의미가 있다”며 “날 것 그대로의 촉각을 전달하기 위해 액자를 벗긴 게 이번 전시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세필 붓의 정교한 움직임을 따라 그어진 선들은 시각과 함께 촉각적인 느낌을 더한다. 재직한 학교 앞 버드나무를 그린 ‘무제’(1990년대)가 대표적이다. 수많은 색깔의 선이 중첩돼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가 완성됐다. 청계천 고물상에서 구한 거울에 천을 덧대고 그 위에 극사실적 형상을 그려 나가며 유리에 비친 자기 얼굴까지 담은 ‘무제’(1970년대 후반) 역시 마치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 같다.

한 번의 필획으론 완성되지 않는 그림이란 점에서 김홍주의 작품은 완성까지 적잖은 시일이 걸린다. 몇 달 걸려 작업하고선 수년 뒤 다시 꺼내 또 다른 선을 긋는 일이 다반사다. 김홍주는 “그저 그린다”고 말한다. 그림을 그리고 캔버스에 선을 긋는 행위 자체가 삶이고 일상이란 뜻이다.

김홍주의 회화는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선 유명하다. 서울 신라호텔이 2013년 재개관 이후 지난해 ‘프리즈 서울 2023’을 위해 이배의 작품으로 바꾸기 전까지 10년간 로비 벽면에 김홍주가 그린 커다란 꽃 그림을 걸고 투숙객을 맞이한 이유이기도 하다. 세밀한 선들의 엉킴과 중첩이 사진으론 충분히 담기지 않는 만큼 직접 눈에 담으러 들러도 좋다. 전시는 5월 19일까지.

유승목 기자 moki912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