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산천은 神이 내린 정원"…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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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들꽃 하나,
나무 하나로
땅에 詩 써내려 간
'한국 조경의 대모'
1세대 조경가 정영선
박목월이 아꼈던 소녀
글 잘 썼지만 연필 대신 삽
잡초도 그녀 손 타면 한 줄의 시
숨 쉬는 모든 것들을 위하여
창의적이면서 한국적 디자인
국립미술관서 '조경철학' 전시 중
나무 하나로
땅에 詩 써내려 간
'한국 조경의 대모'
1세대 조경가 정영선
박목월이 아꼈던 소녀
글 잘 썼지만 연필 대신 삽
잡초도 그녀 손 타면 한 줄의 시
숨 쉬는 모든 것들을 위하여
창의적이면서 한국적 디자인
국립미술관서 '조경철학' 전시 중
“할아버지 과수원엔 집채만 한 바위들이 있었어. 그 밑에 우리 아버지가 백합 한 송이, 어떨 땐 마리골드 한 송이를 가져다 심었는데, 그렇게 아름다운 그림이 또 없어. 그 기억은 지금도 내 영감의 원천이야. 그렇고말고.”
60년도 더 된 얘기다. 경북 성암산 자락에 큰 바위 일곱 개가 있어 칠암과수원으로 불리던 농장의 손녀딸은 어린 시절 꽃과 나무에 푹 빠졌다고 했다. 교사였던 아버지의 동료이자 이름난 시인 박목월(1915~1978)이 아꼈을 정도로 시 쓰는 재주가 뛰어났던 소녀는 커가면서 연필 대신 삽을 드는 날이 더 많았다. 흙을 종이 삼아 꽃과 나무로 시를 쓰려 한 것이다. 이름 모를 들꽃이나 잡초도 소녀의 손을 타면 한 줄의 시구가 됐다.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게 시상(時想)이었다.
10대 소녀가 80대 할머니가 될 때까지 평생에 걸쳐 땅에 새긴 시들은 전국민이 읽는 ‘스테디셀러’가 됐다. 경춘선 숲길을 산책하거나 선유도공원 나들이 갈 때는 물론 공연을 보러 예술의전당을 찾거나 미술 전시를 즐기러 호암미술관에 들를 때면 늘 자연스레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모두 그 소녀가 온 삶을 바쳐 설계한 작품이다. 소녀의 이름은 정영선(83). 현대적인 조경(造景)의 개념을 정착시켜 ‘한국 조경의 대모’로 불리는 1세대 조경가다. 식물을 돌보며 힐링하는 ‘식집사’ ‘꽃집사’가 유행하는 요즘, 정영선의 이름이 곳곳에서 오르내린다. 식목일인 지난 5일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정영선의 조경 철학을 조명한 전시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가 열리면서다. 오는 9월까지 반 년가량 열리는 올해 국립현대미술관의 핵심 전시인데, 미술관 내부 중정과 외부 마당에 한국에서만 자생하는 고유 식물로 정영선이 직접 정원을 꾸몄다. 창의적이면서도 한국적인 디자인 언어를 구축한 정영선의 조경 철학과 녹음 우거진 작업물이 시각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은 것이다. 오는 17일엔 그동안의 업적과 정영선 조경가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는 시’도 개봉한다.
정영선은 한국 조경 역사의 산증인이자 개척자다. 아버지와 함께 정원을 꾸미며 얻은 기쁨을 안고 서울대 농학과에 진학했지만, 정작 조경을 배우긴 어려웠다. 먹고살기 바빴던 당시엔 조경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 “농대에서 중요한 건 벼농사였고, 화훼·원예는 배울 경황도 없었다”는 그는 서른줄에 접어든 1973년 서울대 환경대학원으로 진학했다. 벌거숭이 민둥산이던 국토를 정비하고, 해외 선진국 같은 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본 정부 기조에 따라 조경학과가 만들어진 때다. 정영선은 대학원을 1호로 졸업하고, 내친김에 한국 1호 국토개발기술사까지 따내며 본격적으로 국가 차원의 조경 프로젝트에 나섰다.
1984년 아시안게임 기념공원과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예술의전당 같은 굵직한 공간의 조경이 모두 정영선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은 그의 뚝심을 잘 드러내는 공간이다. 자연이 살아있는 공간에 주차장을 넣겠다는 초기 계획안을 보고선 공무원 앞에서 김수영 시인의 ‘풀’을 낭독한 일화는 유명하다.
“버드나무를 다 베내고 운동장 넣고 주차장을 만들려는데, 기가 차지 않았겠어요. 계획안에 반대한다고 얘기만 해서 될 게 아니다 싶어 사람들을 끌고 나가 자연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공간 한번 만들어 보자고 했지요.” 국내 첫 생태공원인 이곳은 천연기념물 황조롱이를 비롯한 희귀 동식물이 사는 도심 속 천연자원의 보고가 됐다.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를 벗어나 처음 진행한 일이 희원으로, 조경가로서 성장하게 된 곳입니다.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덕에 멋진 정원을 만들고 이후 수없이 많은 정원 작업을 할 수 있게 됐어요.”
희원에서 보듯, 그의 조경 철학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에 있다.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정교하지만 다소 인위적인 중국이나 일본 정원과 달리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조선 정원의 아름다움을 빼닮았다. “한국의 산천은 신이 내린 정원”이라는 그는 노란 ‘미나리 아재비’ 같은 들꽃들도 정원에 품는다.
“좋은 경치를 바라보면서도 요란하지 않고 자연에 스며들어 가는 게 우리의 정원이지요. 우리 산천이 내 작업의 교과서였어요.”
정영선은 자신의 조경 철학을 이번 전시를 통해 젊은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아파트 난개발로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측면이 많다”며 “섬세하게 손질하고 쓰다듬은 정원의 꽃과 나무를 보며 치유와 회복을 얻길 바란다”고 했다.
유승목 기자 moki9125@hankyung.com
60년도 더 된 얘기다. 경북 성암산 자락에 큰 바위 일곱 개가 있어 칠암과수원으로 불리던 농장의 손녀딸은 어린 시절 꽃과 나무에 푹 빠졌다고 했다. 교사였던 아버지의 동료이자 이름난 시인 박목월(1915~1978)이 아꼈을 정도로 시 쓰는 재주가 뛰어났던 소녀는 커가면서 연필 대신 삽을 드는 날이 더 많았다. 흙을 종이 삼아 꽃과 나무로 시를 쓰려 한 것이다. 이름 모를 들꽃이나 잡초도 소녀의 손을 타면 한 줄의 시구가 됐다.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게 시상(時想)이었다.
10대 소녀가 80대 할머니가 될 때까지 평생에 걸쳐 땅에 새긴 시들은 전국민이 읽는 ‘스테디셀러’가 됐다. 경춘선 숲길을 산책하거나 선유도공원 나들이 갈 때는 물론 공연을 보러 예술의전당을 찾거나 미술 전시를 즐기러 호암미술관에 들를 때면 늘 자연스레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모두 그 소녀가 온 삶을 바쳐 설계한 작품이다. 소녀의 이름은 정영선(83). 현대적인 조경(造景)의 개념을 정착시켜 ‘한국 조경의 대모’로 불리는 1세대 조경가다. 식물을 돌보며 힐링하는 ‘식집사’ ‘꽃집사’가 유행하는 요즘, 정영선의 이름이 곳곳에서 오르내린다. 식목일인 지난 5일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정영선의 조경 철학을 조명한 전시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가 열리면서다. 오는 9월까지 반 년가량 열리는 올해 국립현대미술관의 핵심 전시인데, 미술관 내부 중정과 외부 마당에 한국에서만 자생하는 고유 식물로 정영선이 직접 정원을 꾸몄다. 창의적이면서도 한국적인 디자인 언어를 구축한 정영선의 조경 철학과 녹음 우거진 작업물이 시각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은 것이다. 오는 17일엔 그동안의 업적과 정영선 조경가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는 시’도 개봉한다.
선유도공원·예술의전당도 그의 손 끝에서
9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난 정영선은 “전시 같은 건 안 하려고 했다”면서도 자신의 전시를 둘러보는 관람객을 바라보며 “황홀하고 감개무량한 순간”이라며 수줍게 웃었다. 그는 “우리나라에 조경이란 분야가 생긴 것도 그럭저럭 반세기가 흘렀다”며 “조경을 건축의 뒷전으로 보는 인식이 컸는데, 이렇게 대접받으며 큰 전시를 선보일 수 있게 돼 기쁘다”고 했다.정영선은 한국 조경 역사의 산증인이자 개척자다. 아버지와 함께 정원을 꾸미며 얻은 기쁨을 안고 서울대 농학과에 진학했지만, 정작 조경을 배우긴 어려웠다. 먹고살기 바빴던 당시엔 조경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 “농대에서 중요한 건 벼농사였고, 화훼·원예는 배울 경황도 없었다”는 그는 서른줄에 접어든 1973년 서울대 환경대학원으로 진학했다. 벌거숭이 민둥산이던 국토를 정비하고, 해외 선진국 같은 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본 정부 기조에 따라 조경학과가 만들어진 때다. 정영선은 대학원을 1호로 졸업하고, 내친김에 한국 1호 국토개발기술사까지 따내며 본격적으로 국가 차원의 조경 프로젝트에 나섰다.
1984년 아시안게임 기념공원과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예술의전당 같은 굵직한 공간의 조경이 모두 정영선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은 그의 뚝심을 잘 드러내는 공간이다. 자연이 살아있는 공간에 주차장을 넣겠다는 초기 계획안을 보고선 공무원 앞에서 김수영 시인의 ‘풀’을 낭독한 일화는 유명하다.
“버드나무를 다 베내고 운동장 넣고 주차장을 만들려는데, 기가 차지 않았겠어요. 계획안에 반대한다고 얘기만 해서 될 게 아니다 싶어 사람들을 끌고 나가 자연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공간 한번 만들어 보자고 했지요.” 국내 첫 생태공원인 이곳은 천연기념물 황조롱이를 비롯한 희귀 동식물이 사는 도심 속 천연자원의 보고가 됐다.
박목월과 이건희가 지지한 ‘검이불루’
정영선의 조경이 예술의 길에 접어들게 된 기점은 1997년 한국 전통 정원의 진수라고 평가받는 호암미술관 ‘희원(熙園)’을 조성하면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빌려와 사람과 관계를 맺는 ‘차경(借景)’의 원리를 비롯해 정자와 연못 등이 서로 유연하게 연결되는 한국 전통 정원의 요소를 구사했다. 그는 자신을 조경가로 만들어준 사람으로 박목월 시인과 함께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부부를 꼽는 이유다.“국가 차원의 프로젝트를 벗어나 처음 진행한 일이 희원으로, 조경가로서 성장하게 된 곳입니다.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덕에 멋진 정원을 만들고 이후 수없이 많은 정원 작업을 할 수 있게 됐어요.”
희원에서 보듯, 그의 조경 철학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에 있다.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정교하지만 다소 인위적인 중국이나 일본 정원과 달리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조선 정원의 아름다움을 빼닮았다. “한국의 산천은 신이 내린 정원”이라는 그는 노란 ‘미나리 아재비’ 같은 들꽃들도 정원에 품는다.
“좋은 경치를 바라보면서도 요란하지 않고 자연에 스며들어 가는 게 우리의 정원이지요. 우리 산천이 내 작업의 교과서였어요.”
정영선은 자신의 조경 철학을 이번 전시를 통해 젊은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아파트 난개발로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측면이 많다”며 “섬세하게 손질하고 쓰다듬은 정원의 꽃과 나무를 보며 치유와 회복을 얻길 바란다”고 했다.
유승목 기자 moki912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