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극장 폐쇄돼 귀국…공연 2시간 전 출연 취소한 배우 대신 무대 올라
'밤의 여왕' 역으로 미국 무대 누벼…"다른 역할에 대한 갈증 있었죠"
코로나로 떠났던 메트 오페라 다시 선 박소영 "인연 참 신기하죠"
"4년 전에는 왜 이렇게 운이 없나 했는데, 이번에는 기적 같은 기회가 찾아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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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가들의 꿈의 무대로 불리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이하 메트 오페라)에서 날개를 펼칠 때쯤 코로나19 유행 탓에 한국으로 돌아왔던 소프라노 박소영이 다시 메트 오페라 무대에 섰다.

박소영은 지난달 30일 메트 오페라가 공연한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줄리엣으로 출연했다.

원래 줄리엣 역은 소프라노 나딘 시에라가 맡았지만, 공연 2시간 전에 건강 문제로 출연하지 못하게 되면서 박소영에게 기회가 왔다.

박소영은 출연 배우가 불가피한 상황으로 무대에 오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예비 배우로 캐스팅돼 있었다.

급하게 연락받고 극장에 달려가 정신없이 무대에 오른 박소영은 '준비된 자'의 진가를 발휘했다.

공연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박소영은 지난 1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메트 오페라와의 인연이 참 신기하다"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는 "제가 선 무대가 낮 공연이었는데, 그 전날 밤까지도 무대에 서기로 한 배우의 컨디션이 안 좋다거나 아무런 말이 없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공연을 할 수 있냐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장난인 줄 알았다"고 다급했던 그날의 상황을 회상했다.

이어 "그날 밤 한국으로 가려고 싸뒀던 짐 속에서 옷을 꺼내 입고 부랴부랴 극장으로 갔다"며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무대에서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할 시간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코로나로 떠났던 메트 오페라 다시 선 박소영 "인연 참 신기하죠"
프랑스 작곡가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분량이 전체의 80%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주역에게 부담이 많은 작품이다.

박소영은 개막에 앞서 2주간 연습 리허설에 참여했었지만, 개막 이후로는 무대 동선 등을 체크해보지 못했다.

천만다행이었던 건 연습 리허설에 시에라가 일주일 늦게 참여하면서, 그 기간에 박소영이 대신 참여해 출연 배우들과 호흡을 맞췄다는 것이다.

박소영은 "저뿐만 아니라 극장 관계자와 다른 배우들도 배우가 갑자기 바뀌어 놀라고 당황했다"며 "그래도 일주일 동안 같이 연습했던 사이고, 출연진 가운데 어렸을 때부터 함께했던 친구들도 있어서 굉장히 호의적인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이어 "지휘를 맡은 야니크 네제 세겐이 공연 전 잠깐 제 방에 오셔서 '편하게 하라'고 했는데 무대에 올라가니 정말 노래하는 게 편했다"며 "인터미션 때 지휘자도 "함께'(together)인 느낌이 들었다'고 말해줬다"고 좋아했다.

박소영은 이전에도 메트 오페라 무대에 선 적이 있다.

2019년 1월 '마술피리' 무대였다.

이 공연을 계기로 이듬해 3월 '라 체네렌톨라'에도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유행으로 극장이 폐쇄되면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공연 3시간 전에 극장 문을 닫아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황당했었다"며 "코로나 상황이 워낙 심해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오게 되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에서도 무대에 섰지만, 아쉬움이 컸기 때문에 미국에 있는 매니저에게 오디션 기회라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며 "줄리엣을 맡았던 공연 영상을 보냈는데 너무 감사하게도 커버(예비 배우)로 불러줘서 공연에 참여하게 됐다"고 웃었다.

코로나로 떠났던 메트 오페라 다시 선 박소영 "인연 참 신기하죠"
한국에 머물며 쌓았던 다양한 무대 경험은 이번 메트 오페라 공연의 밑거름이 됐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가 뉴잉글랜드 음악원을 졸업한 박소영은 LA 오페라, 시카고 리릭 오페라,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 등 주로 미국 오페라 극장에서 활동해왔다.

높은 고음과 화려한 기교로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 역으로 주목받으면서 이 배역으로만 50번 넘게 무대에 섰다.

박소영은 "다른 역할에 대한 갈증이 있었지만, 밤의 여왕이 워낙 강렬해서 그 배역만 계속 들어왔었다"며 "매번 똑같은 배역이다 보니 재미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한국에 와서는 '라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투란도트'의 류,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등 제가 해보고 싶었던 캐릭터들을 하나하나씩 해볼 수 있었다"고 만족해했다.

또 박소영은 올해부터 경희대 음대에서 객원교수로 학생들도 가르치고 있다.

현역으로 무대에 서며 강의를 하는 일이 쉽지 않아 보이지만, 박소영은 "막상 아이들을 가르쳐보니 재밌다"며 의욕을 보였다.

"학생들에게 '내가 옛날에'가 아니라 '내가 어제 무대에서'라고 말해줄 수 있다는 건 좋은 것 같아요.

이제는 한국에 거주하지만, 해외에도 한두 번씩 왔다 갔다 하며 활동하고 싶어요.

늘 프레시한(새로운 모습의) 성악가로 무대에 서는 게 제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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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떠났던 메트 오페라 다시 선 박소영 "인연 참 신기하죠"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