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예술은 돈이 아니다!
예술 작품의 미학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는 비례해야 한다. 한마디로 좋은 작품은 비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례적 연동 관계는 미술시장에서 순조롭게 작동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예술 작품을 사고파는 행위는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채권, 증권처럼 투자 상품이 된 것은 후기 자본주의 체제가 시작된 이후인 1980년대부터다. 이때부터 은행, 증권사, 심지어 헤지펀드 같은 금융투자사들이 예술품을 사기 시작했고, ‘아트펀드’ 명칭이 붙은 금융 상품도 나오기 시작했다. 문화를 즐기기 위해 작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작품을 구매하는 사람들, 작품을 구매하는 동시에 “언제 팔아야 하나요?”라고 질문하는 컬렉터들이 등장한 것이다.

18세기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이후 근대 경제체제는 약 250년의 역사를 거쳤다. 그동안 호황과 불황의 경기변동, 경제공황 등의 다양한 사회적 비용을 경험하며 자유방임주의, 수정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등의 경제 제도를 실험해 왔다. 그러면서 자본주의를 진보시키기 위해 다양한 제도와 법률을 만들어 왔다.

실물 생산 미술 경제가 아닌 금융자산 미술 경제의 역사는 신자유주의 이후 4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성문화된 제도나 법률이 미비할 수밖에 없다. 내부자 거래, 작전 거래, 독과점 등 무엇이든 가능한 것이 미술시장이다. 작가가 자기 작품을 옥션에 위탁하고 스스로 경매해 고가의 작품으로 만들어 놓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몇몇 사람이 특정 작품의 순환 거래 가격을 상승시켜도 괜찮다. 만약 이런 행위가 일반 시장에서 이뤄지면 당연히 불법이며, 거래자는 감옥에 가게 될 것이다. 미국의 한 저널리스트가 ‘미술작품의 미학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쓴 적이 있었다. 미술계에서 소수의 자본 권력에 의한 인위적 시장 조정이 아주 쉽게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자본은 예술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근본적 동인 중 하나다. 작가의 창작 역량을 자본으로 보상받지 못하면 미술계는 돌아가지 않는다. 하다못해 물감과 붓을 살 돈이 있어야 작품을 제작할 수 있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자본이 예술계에 유입되고 있다. 고무적이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자칫 자본이 예술보다 상위에 위치하면 예술은 그 순수한 목적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조력의 결과물인 예술을 ‘심미적 경험을 통해 우리의 본질과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한 매개체’로 이해했다. 우리는 어쩌면 예술이 자본보다 우위이거나 적어도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는 것 같다. 예술은 돈이 아니라 ‘예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