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고소하다 '빚더미'...'미생 탈출' 시도했던 괴짜 최후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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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가 존경한 '그리스 사람'
엘 그레코(1541~1614)
끊임없는 소송전 벌이고
가난에도 시달렸지만
'미생'에서 '완생'으로
엘 그레코(1541~1614)
끊임없는 소송전 벌이고
가난에도 시달렸지만
'미생'에서 '완생'으로

남자의 이름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 다만 길고 어려운 그의 그리스식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엘 그레코’(그리스인)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뒤에서 다른 별명을 수군댔습니다. ‘고소왕’, ‘돈에 미친 그리스 놈’이라고요.
엘 그레코 자신도 그런 평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소송을 계속해봐야 얻을 게 전혀 없다는 것도요. 사람들을 고소해 돈을 벌기는커녕, 막대한 소송 비용을 대느라 남자는 막대한 빚까지 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소송을 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외국인 사업가였고, 싸움닭이었으며, 가난한 아버지였고, 현대미술의 문을 열어젖힌 위대한 화가, 엘 그레코의 사연을 풀어 봅니다.
섬 동네 출신 ‘미생 화가’
엘 그레코의 시작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그의 고향은 그리스 인근의 크레타섬. 소의 머리에 사람 몸을 한 그리스 신화 속 괴물, 미노타우로스 전설로 유명한 이 섬은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1541년 이곳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콘(동방 교회의 종교화)을 그리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금세 두각을 드러내 20대 초반에 이미 대가로 대접받았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건 공방을 만들고 고가의 의뢰를 받아 작품들을 그려낼 정도로요. 자기 일만 하던 대로 잘하면 남은 평생 부와 성공을 누릴 수 있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베네치아행을 결심한 건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엘 그레코를 말렸습니다. 비유하자면, 성공한 청년 사업가가 갑자기 사업을 내던지고 “더 넓은 세상에서 새롭게 도전하고 싶다”며 미국에서 무일푼으로 다시 시작하는 격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걱정은 맞아떨어졌습니다.
당시 베네치아에는 천재적인 화가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티치아노였습니다. 베네치아의 ‘1타 화가’인 그는 대부분의 의뢰를 독점했습니다. 라이벌을 자처하는 천재 화가 틴토레토와 베로네세조차, 티치아노가 바쁠 때를 노려 하나씩 일거리를 가져갈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다른 화가들은 일감을 거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탓에 다른 곳에 가면 거장 대접을 받을 만한 천재들조차 베네치아에 왔다가 아예 붓을 꺾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러니 젊은 촌뜨기 화가 엘 그레코에게 기회가 돌아오지 않은 것도 당연했습니다.
처음으로 세상의 쓴맛을 본 엘 그레코.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엘 그레코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또 다른 유럽 예술의 중심지 로마에서 도전을 이어가기로 결심합니다. 선배 화가(줄리오 클로비오)의 도움을 받아 그는 로마에 집을 구한 뒤 초상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초상화는 “(너무 잘 그려서) 로마의 모든 화가를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엘 그레코의 끝없는 자신감과 튀는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엘 그레코는 교황청에 이렇게 제안했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다시 그릴 수 있게 해주세요. 제가 그 위에 훨씬 더 멋지고 교황청의 품격에도 맞는 그림을 새로 그리겠습니다.” 이미 엘 그레코는, 미켈란젤로보다 자신의 그림 실력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생각은 다른 기록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누군가 엘 그레코에게 미켈란젤로를 좋아하는지 묻자 돌아온 대답. “미켈란젤로? 훌륭한 예술가지. 그림 그리는 법은 잘 모르긴 하지만.”

그의 나이도 어느덧 서른다섯 살. 세계 미술의 중심지에서 인정받는다는 목표 하나로 10년을 달려왔지만, 그 도전은 물거품이 돼버렸습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쯤에서 ‘이제 더는 안 되겠다. 할 만큼 했으니 더 늦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했을 겁니다. 엘 그레코가 롤 모델로 삼았던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는 20대 초반부터 거장 대접을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엘 그레코는 생각했습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난 여기서 끝날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그는 새롭게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행선지는 바로 스페인의 도시 톨레도였습니다.
소송, 실패, 좌절
엘 그레코가 스페인행을 택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단 당시 스페인은 돈이 많았습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스페인은 당시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은으로 떼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독실한 가톨릭 국가인 만큼 종교 그림에 대한 수요도 많았습니다. 반면 이탈리아에 비해 화가들 사이의 경쟁은 상대적으로 덜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작품 가격을 결정하는 당시 스페인 특유의 방식(‘타사시온’)도 화가에게 터무니없이 불리하게 돼 있었습니다. 화가가 재료비를 선금으로 받은 뒤, 완성된 작품을 보고 고객과 합의해서 가격을 정하는 ‘후불제’였으니까요. 당연히 고객들은 갖은 트집을 잡아 그림값을 깎으려 했습니다. 이런 갈등은 결국 몇 년에 걸친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습니다. 결론이 날 때까지 화가는 돈을 받을 수 없었고, 소송에 시간과 돈을 무한정 빼앗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화가는 어쩔 수 없이 작품을 헐값에 넘기곤 했습니다. 일단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여기에 또 하나의 좌절이 겹쳤습니다. 엘 그레코가 스페인으로 온 건, 왕의 궁정 화가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궁정 화가가 되면 좀 더 안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스페인 황실이 의뢰한 작품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는 그에게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였습니다. 엘 그레코는 자신의 실력을 모두 쏟아 독창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좌절을 넘어 예술혼을 불태우다

엘 그레코의 독창적인 화풍이 폭발하듯 꽃을 피운 건 이 시기였습니다. ‘그동안 내가 실패했던 건 어설프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썼기 때문이 아닐까. 이 시대가 나를 알아보건 말건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대로 그리겠다.’


그의 화풍은 전통을 중시하던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파격적이고 충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꽉 막힌 교황청이나 황실과는 달리 마음이 열려있는 일반인들 중에서는 이런 화풍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점차 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화풍엔, 마음을 흔드는 강렬함과 함께 ‘엘 그레코 작품이구나’ 하고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독창성이 있었습니다.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이 그렇습니다. 그림 아래쪽에서는 오르가즈 백작의 시신이 무덤으로 옮겨지는 과정이, 위쪽에는 천사가 그의 영혼을 인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무대처럼 고루 빛이 쏟아지는 아래쪽과 달리 천상의 모습은 신비로운 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같은 시대 어느 나라 누구의 미술에서도 보기 어려운 신비로우면서도 독특한 방식입니다.

불을 댕겨 ‘완생’이 되다


엘 그레코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은 그의 작품이 품은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가식적이고 과장됐다”는 평가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도 수백 년 앞서 있던 그의 시각을 마침내 따라잡기 시작했습니다. “‘보이는 대로 그리는 기술’에 가깝던 그림을 순수 예술로 확장한 선구자”(안토니오 팔로미노), “우리보다 훨씬 앞서서 길을 안내하며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거장”(로저 프라이) 등 찬사도 쏟아졌습니다.
파블로 피카소도 그의 열렬한 팬 중 한 명이었습니다. 출신은 스페인이지만 대부분의 삶을 프랑스 등 외국에서 살았던 피카소는 엘 그레코의 천재성과 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얼마나 깊이 공감했는지 자신을 엘 그레코와 동일시해서, ‘나, 엘 그레코’라는 제목의 드로잉을 그렸을 정도입니다. 그를 대표하는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 역시 엘 그레코의 ‘성 요한의 환영’을 많이 참고해 그린 작품입니다. 그 밖에도 폴 세잔, 외젠 들라크루아, 에두아르 마네, 잭슨 폴록 등 미술계 거장,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등이 엘 그레코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타성에 젖어 어둠 속에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엘 그레코는 생각했습니다. 그가 댕긴 불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표현할 수 있다는 창작의 불씨이자 자유의 불씨였습니다. 그 불은 활활 타올라 훗날을 살아가는 모든 예술가의 마음에도 옮겨붙었습니다. 그렇게 미생의 삶을 산 엘 그레코는 최종적으로 ‘완생’(完生) 이자 전설적인 예술가가 되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까지 온기를 전하게 됐습니다.

**이번 기사는 El Greco: Ambition and Defiance(Rebecca J Long 등 지음), 엘 그레코(미하엘 숄츠 헨젤 지음, 김명숙 옮김, 마로니에북스|taschen)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1두카트의 가치는 16세기와 현대의 구매력을 기준으로 단순 변환해 21만원으로 일괄 계산했습니다.
***칼럼을 기반으로 최근 출간된 책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과 관련해, 4월 11일 저녁 강남에서 북토크 행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신청 및 자세한 행사 정보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참고해 주세요.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5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