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터전 잃고 깊은 상처…의식주 지원과 함께 심리 치료도 중대 과제
컨테이너 캠프 곳곳에 이재민 심리지원 센터…어른도 '마음 치료' 참여
[르포] "발바닥에 불안 느껴요" 튀르키예 아이들에 남은 강진 트라우마
"아이들에게 불안이 몸의 어느 부분에서 느껴지는지 물으면 '발바닥'이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아요.

지진을 경험했기 때문이죠."
지난 25일(이하 현지시간) 튀르키예 하타이주 한 컨테이너 캠프 내 '빌릭테 아동·청소년·가족 지원 허브'에서 일하는 심리학자 닐라이 괵첼리(27) 씨는 많은 아이들이 강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작년 2월 튀르키예를 덮친 규모 7.8의 지진으로 수많은 죽음과 상실을 경험한 아이들에겐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어도 강진이 '현재 진행형'인 셈이다.

이 허브를 찾는 아이들은 바로 옆 컨테이너 집에 사는 이재민들이다.

강진으로 집을 잃은 주민들은 곳곳에 마련된 컨테이너 캠프에 자리를 잡았다.

유엔아동기금(UNICEF·유니세프)은 튀르키예 적신월사(적십자에 대응하는 이슬람권 구호기구) 등과 협력해 지진 피해가 난 튀르키예 10개 지역에 고정식 또는 이동식 지원 센터 47개를 세웠다.

'빌릭테'는 '함께'라는 뜻의 튀르키예어로 허브에선 아동과 청소년, 어린 아이를 둔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정신건강·심리 지원 등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날도 허브에는 6∼9세 어린이 10여명이 찾아와 가면에 행복과 놀라움, 슬픔 등의 감정을 그리고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이를 건강하게 표출할 수 있도록 돕는 활동이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무당벌레 문양을 넣어 놀란 표정을 그렸어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축구팀 색으로 가면을 칠했어요.

선생님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 중 누굴 더 좋아하세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쉴새없이 재잘거리는 아이들은 지진의 공포를 잊은 듯했다.

그러나 괵첼리 씨는 "지진이 나던 날 비가 왔는데 아직도 천둥이 치거나 비가 오면 잠을 못잔다는 아이들이 있다.

원래 살던 집이 큰 타격을 받지 않아 돌아가도 되지만 무서워서 집에 가지 못하거나 1층짜리 컨테이너 집이 오히려 안전하다고 느끼기도 한다"며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가 남아 있다고 전했다.

[르포] "발바닥에 불안 느껴요" 튀르키예 아이들에 남은 강진 트라우마
이곳의 어린이들처럼 지진을 겪은 아이들이 긴 시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경우는 적지 않다.

특히 가족이나 가까운 이들을 잃었을 때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생존과 직결된 보금자리, 영양, 식수 문제 해결과 더불어 심리치료는 튀르키예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로 꼽힌다.

가지안테프 누르다으에 사는 프나르(34)씨의 세 아이는 지진 당시 아버지의 사망을 직접 목격했다고 했다.

프나르씨는 "철근이 남편의 등에 박혔고, 아이들의 눈 앞에서 죽었다.

남은 가족들은 이틀만에 구조가 됐다"며 "아이들은 집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근처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 가도 건물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설치된 텐트 안에서 잔다.

아이들이 혼자 잠들지 못해 지금도 같이 자야 한다"고 말했다.

여덟살짜리 막내아들은 아직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아이는 최근 학교에서 받아 온 '독서왕' 메달을 컨테이너 집 벽 한쪽에 걸린 아버지의 사진에 함께 걸어두었다.

어른들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프나르씨는 아이들이 잠시 밖으로 나간 사이 "지진 당시 충격으로 나도 너무 힘들다"고 털어놨다.

이같은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지진 피해 지역 내 각 컨테이너 캠프에는 누구나 찾을 수 있는 심리 지원 센터들도 설치돼 있다.

유니세프와 튀르키예 외상재해 정신건강 연구협회(TARDE) 등도 개인·그룹 상담 서비스를 제공한다.

26일 찾은 카흐라만마라슈의 한 컨테이너 캠프에선 이곳에 거주하는 성인 여성 10여명이 한데 모여 마음의 상처를 나누고 위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르포] "발바닥에 불안 느껴요" 튀르키예 아이들에 남은 강진 트라우마
한 여성이 "지진으로 부모님을 비롯해 가족 10명을 잃었다.

1년이 지났지만 너무 힘들다"며 눈물을 터트리자 다른 이들은 함께 눈물을 흘리며 그를 다독이기도 했다.

캠프에서 근무하는 심리상담가 세브잔(29) 씨는 "트라우마의 종류와 표출 방법은 모두 다양하다.

성인의 경우 치료를 통해 불면이나 폐쇄공포, 대인기피 등의 증상이 완화되고 매일 지진이 난 그 날을 사는 듯한 기분도 덜 느낄 수 있다"며 일상 회복을 위해 적절한 상담과 치료가 동반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유니세프 튀르키예 사무소 관계자는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는 가족들의 경우 이를 해결하려면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릴 수 있다"며 "지원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제공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