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방문하면 ‘탄하우저 컬렉션전’을 통해 벨 에포크 거장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독일 출신의 화상이었던 저스틴 탄하우저가 구겐하임 미술관에 기증한 70여 점의 작품으로 구성된 이 컬렉션에는 고갱, 고흐, 드가, 모네, 세잔, 피카소 등 20세기 전후 현대미술의 흐름을 견인했던 거장들의 주요 작품이 포함되어있다. ‘탄하우저 컬렉션전’은 컬렉션 중 30여 점만을 선별해 보여주지만, 이 작품들로도 유럽 모던 아트의 전개 과정을 읽어내기에 충분하다.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의 외딴집, 1867,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소장.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의 외딴집, 1867,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소장.
이 컬렉션을 대표하는 주요 작품들을 살펴보자. 인상주의 화가 피사로는 파리 근교의 퐁투아즈에서 생활하며 작품을 제작했는데, ‘퐁투아즈의 외딴집’(1867)은 이곳에서 제작된 그의 대표작이다. 나비파의 작가 뷔야르가 그린 ‘뱅티밀 광장’(1909-1910)은 당대의 예술가들이 즐겨 그렸던 파리의 근대화된 풍경을 부감의 시선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일본풍, 즉 자포니즘의 영향을 받아 뷔야르는 족자나 병풍 형식의 작품들을 제작하곤 했는데, ‘뱅티밀 광장’도 그중 하나다.
에두아르 뷔야르, 뱅티밀 광장, 1909-1910,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소장.
에두아르 뷔야르, 뱅티밀 광장, 1909-1910,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소장.
탄하우저 컬렉션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작가는 피카소다. 30여 점 가까운 컬렉션 작품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파리에서 그린 그의 초기작들이다. 스페인 출신의 피카소는 1900년에 파리를 처음 방문했고, 4년 뒤인 1904년부터는 아예 파리에 정착해 활동했다. 이곳에서 피카소는 벨 에포크의 미술, 더 나아가 서구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하는 작가가 될 수 있었다. ‘물랭 드 라 갈레트’(1900)는 그가 파리를 처음 방문한 해에 그곳에서 그린 첫 작품으로, 19살의 피카소를 매혹시킨 ‘빛의 도시’ 파리의 아름다움과 낭만을 엿보게 해준다.
파블로 피카소, 물랭 드 라 갈레트, 1900,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소장.
파블로 피카소, 물랭 드 라 갈레트, 1900,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소장.
한편, 2023년 초에는 탄하우저 컬렉션에 포함된 피카소의 초기작 ‘다림질하는 여인’(1904)을 둘러싼 소송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원래 이 작품을 소유했던 소장가 칼 아들러의 유족이 구겐하임 미술관을 상대로 작품 반환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아들러는 1916년 탄하우저 갤러리에서 ‘다림질하는 여인’을 구입했고, 1938년에 이 작품을 갤러리에 재판매했다. 1930년대 나치의 독일 집권이 시작되자 유대인이었던 아들러도 독일을 떠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3900만 원 정도의 가격에 작품을 판매한 것이다. 이후 저스틴 탄하우저가 구겐하임 미술관에 기증한 ‘다림질하는 여인’의 현재 시세는 약 2500억 원에 달한다. 나치 치하에서 어쩔 수 없이 헐값에 작품 판매가 이뤄진 만큼, 이 거래가 무효라는 것이 아들러 유족의 주장이다.

거액의 그림 값을 둘러싸고 벌어진 황당한 해프닝처럼 보이는 이 소송전은 실은 나치 치하에서 벌어진 유대인 박해의 여파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기도 하다. 독일 출신의 탄하우저 가족이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했고, 그것이 여전히 뉴욕의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역사와 연관된 것이다. 하인리히 탄하우저는 1909년 뮌헨에 탄하우저 갤러리를 오픈하고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미래주의 미술 등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전위미술을 주로 소개했다. 독일에서 피카소의 회고전을 처음 개최했고, 100여 점이 넘는 고흐의 작품을 거래한 곳도 탄하우저 갤러리였다.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어서, 탄하우저 갤러리를 통해 칸딘스키와 그가 활동했던 그룹 청기사파의 작품이 소개될 수 있었다.
파블로 피카소, 다림질하는 여인, 1904,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소장.
파블로 피카소, 다림질하는 여인, 1904,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소장.
뮌헨에 이어 베를린과 스위스 루체른에까지 분점을 열며 확장세를 이어가던 탄하우저 갤러리는 나치의 독일 집권이 시작된 1930년대 이후로는 운영의 어려움을 겪었다. 이 갤러리를 설립한 하인리히 탄하우저와 그의 아들 저스틴 탄하우저가 모두 유대인이었던 탓이다. 나치 정권은 탄하우저 갤러리가 취급했던 당대의 전위미술을 ‘퇴폐미술’로 규정하고, 예술가와 작품에 대한 직접적인 박해를 가하기도 했다. 1937년에는 탄하우저 갤러리의 본점이 위치한 뮌헨에서 ‘퇴폐미술전’을 열었는데, 여기에는 칸딘스키와 피카소를 포함한 당대 주요 작가들의 작품이 대부분 전시되었다. 이후 독일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퇴폐미술로 낙인찍힌 전시 출품작들은 압수되어 소각되거나 경매를 거쳐 헐값에 외국으로 팔려나갔다. 전시를 통해 퇴폐미술가로 지목된 작가들의 작품 제작도 금지되었다.

탄하우저 갤러리도 ‘퇴폐미술전’이 열린 해에 갤러리의 문을 닫았고, 저스틴 탄하우저는 독일을 떠나 1940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이 시기에 마침 솔로몬 구겐하임은 자신이 소장한 유럽의 모던 아트 작품들을 전시하고자 재단을 설립해 구겐하임 미술관 설립의 초석을 다지고 있었다. 구겐하임은 1890년대부터 유럽 거장들의 작품을 수집했고, 특히 1930년에는 독일에 있는 칸딘스키의 작업실을 직접 방문해 작품을 구입한 이력이 있었다. 이때 이미 탄하우저 갤러리 관계자들과는 친분을 형성했던 터였다. 이들이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오게 되자 구겐하임과의 관계도 뉴욕을 중심으로 다시 이어졌고, 이 인연이 결국 탄하우저 컬렉션의 기증을 가능하게 했다.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과 뉴욕 현대미술관 등 뉴욕을 대표하는 미술관의 역사는 그 설립자들이 19세기 말부터 유럽의 현대미술을 수집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미술관들이 보유한 소장품의 엄청난 양과 가치에 더해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수많은 유럽 미술인들의 영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새로운 미술 중심지로 급부상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탄하우저 컬렉션도 나치의 집권과 함께 아름다운 시절의 미술이 퇴폐 미술로 전락하는 과정과 그것이 새로운 미술 중심지 미국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되는 다층적인 역사적 맥락이 교차하는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벨 에포크의 시기의 아름다운 작품들로 구성된 탄하우저 컬렉션의 이면을 살펴보는 것이 꼭 필요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