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는 퇴폐미술" 나치 한 마디에 미국으로 몰려간 세기의 명작들
구겐하임 미술관의 '탄하우저 컬렉션'
벨 에포크 미술이 퇴폐미술이 되기까지
거액의 그림 값을 둘러싸고 벌어진 황당한 해프닝처럼 보이는 이 소송전은 실은 나치 치하에서 벌어진 유대인 박해의 여파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기도 하다. 독일 출신의 탄하우저 가족이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했고, 그것이 여전히 뉴욕의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역사와 연관된 것이다. 하인리히 탄하우저는 1909년 뮌헨에 탄하우저 갤러리를 오픈하고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미래주의 미술 등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전위미술을 주로 소개했다. 독일에서 피카소의 회고전을 처음 개최했고, 100여 점이 넘는 고흐의 작품을 거래한 곳도 탄하우저 갤러리였다.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어서, 탄하우저 갤러리를 통해 칸딘스키와 그가 활동했던 그룹 청기사파의 작품이 소개될 수 있었다. 뮌헨에 이어 베를린과 스위스 루체른에까지 분점을 열며 확장세를 이어가던 탄하우저 갤러리는 나치의 독일 집권이 시작된 1930년대 이후로는 운영의 어려움을 겪었다. 이 갤러리를 설립한 하인리히 탄하우저와 그의 아들 저스틴 탄하우저가 모두 유대인이었던 탓이다. 나치 정권은 탄하우저 갤러리가 취급했던 당대의 전위미술을 ‘퇴폐미술’로 규정하고, 예술가와 작품에 대한 직접적인 박해를 가하기도 했다. 1937년에는 탄하우저 갤러리의 본점이 위치한 뮌헨에서 ‘퇴폐미술전’을 열었는데, 여기에는 칸딘스키와 피카소를 포함한 당대 주요 작가들의 작품이 대부분 전시되었다. 이후 독일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퇴폐미술로 낙인찍힌 전시 출품작들은 압수되어 소각되거나 경매를 거쳐 헐값에 외국으로 팔려나갔다. 전시를 통해 퇴폐미술가로 지목된 작가들의 작품 제작도 금지되었다.
탄하우저 갤러리도 ‘퇴폐미술전’이 열린 해에 갤러리의 문을 닫았고, 저스틴 탄하우저는 독일을 떠나 1940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이 시기에 마침 솔로몬 구겐하임은 자신이 소장한 유럽의 모던 아트 작품들을 전시하고자 재단을 설립해 구겐하임 미술관 설립의 초석을 다지고 있었다. 구겐하임은 1890년대부터 유럽 거장들의 작품을 수집했고, 특히 1930년에는 독일에 있는 칸딘스키의 작업실을 직접 방문해 작품을 구입한 이력이 있었다. 이때 이미 탄하우저 갤러리 관계자들과는 친분을 형성했던 터였다. 이들이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오게 되자 구겐하임과의 관계도 뉴욕을 중심으로 다시 이어졌고, 이 인연이 결국 탄하우저 컬렉션의 기증을 가능하게 했다. 구겐하임 미술관과 뉴욕 현대미술관 등 뉴욕을 대표하는 미술관의 역사는 그 설립자들이 19세기 말부터 유럽의 현대미술을 수집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미술관들이 보유한 소장품의 엄청난 양과 가치에 더해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수많은 유럽 미술인들의 영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새로운 미술 중심지로 급부상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탄하우저 컬렉션도 나치의 집권과 함께 아름다운 시절의 미술이 퇴폐 미술로 전락하는 과정과 그것이 새로운 미술 중심지 미국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되는 다층적인 역사적 맥락이 교차하는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벨 에포크의 시기의 아름다운 작품들로 구성된 탄하우저 컬렉션의 이면을 살펴보는 것이 꼭 필요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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