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에타노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 1797~1848) © 독일 위키피디아
가에타노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 1797~1848) © 독일 위키피디아
수많은 오페라 아리아 중에서 각인효과가 뛰어난 제목 셋을 고른다면? ‘그대의 찬 손’과 ‘별은 빛나건만’, 그리고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아닐까. ‘그대의 찬 손’은 푸치니의 ‘라보엠’ 1막에, 역시 푸치니 곡 ‘별은 빛나건만’은 오페라 토스카 막판에 나온다.

그리고 오늘의 노래 ‘남몰래 흘리는 눈물(Una Furtiva Lagrima)’.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 1797~1848, 伊)가 만든 오페라 ‘사랑의 묘약/L'elisir D'amore’을 관통하는 명곡(名曲)이다. 이 아리아를 둘러싼 일반 대중의 스펙트럼은 크게 셋일 것이다. 제목만 알거나 들어본 부류, 첫 소절 ‘우나 푸르티바 라그리마’와 곡조를 대충이라도 아는 축, 그리고 제목⸱악곡⸱배경을 모두 꿰차고 있는 실력자들. 당신이 만약 이 순간까지 앞의 둘에 속한다면 오늘이야말로 무지(無知)의 갑옷을 벗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오페라 '사랑의 묘약' 오리지널 포스터(1832) © 독일 위키피디아
오페라 '사랑의 묘약' 오리지널 포스터(1832) © 독일 위키피디아
우선 전주(前奏)가 기가 막히다. 바순이 분위기를 잡으며 하프가 은은히 깔린다. 플루트가 화려하고, 오보가 정감 있고, 클라리넷이 변화무쌍하다면, 바순은 질박⸱단순하다. 악단에서도 앞줄 왼쪽에 플루트, 오른쪽이 오보. 뒷줄은 좌(左)가 클라리넷, 우(右)가 바순 아니던가. 마이너가 분명한 그 바순 선율을 듣노라면 묘한 마법에 끌리며 가슴속이 적셔온다.

바순은 바로 주인공 네모리노의 모습이다. 네모리노는 누구인가? 70~80년대만 하더라도 이 땅의 웬만한 동네에는 소위 ‘바보’라 불리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꼭 있었다. 칠복이⸱삼룡이⸱만득이 등등. 순진무구한 영혼들! 이들은 착했으나 자신의 주제를 모르는, 곧 자기객관화 설정과 구동이 안 되는 공통점이 있었다. 네모리노가 그랬다.
약장수 둘카마라가 가짜 ‘사랑의 묘약’을 파는 장면 © 독일 위키피디아
약장수 둘카마라가 가짜 ‘사랑의 묘약’을 파는 장면 © 독일 위키피디아
2백 년 전 스페인 어느 시골 마을. 빼어난 미모에 집안도 좋은 아디나(Adina)는 선망의 대상. 청년 소작농 네모리노(Nemorino)는 언감생심 그녀를 사모한다. 어느 날 가짜 약장수, 둘카마라(Dulcamara)가 나타나 한 모금 마시기만 하면 서로 사랑에 빠진다는 ‘사랑의 묘약’을 파는데 여기 매달린다. 해법은 묘한 데서 풀린다. 대처에 살던 삼촌이 막대한 유산을 네모리노에게 물려준 것. 금상첨화라 했던가? 아디나는 네모리노가 군인이 되면 주는 지원금으로 약을 사기 위해 입대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한다. 이때 절로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네모리노가 부르는 노래가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려요/나를 사랑하는 게 느껴져요/나만큼이나 그녀도 가슴이 떨리나 봐요/그녀의 숨결이 나의 호흡과 하나가 되고 있어요/아, 그녀가 나를 사랑하다니/나는 이제 죽어도 좋아요”. 구슬픈 사랑의 찬가! 역설의 미학이다.
네모리노 역에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아디나 역에 소프라노 유디트 블레겐 모습 © 2024 WNET
네모리노 역에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아디나 역에 소프라노 유디트 블레겐 모습 © 2024 WNET
파바로티(1935~2007)의 절창은 범접불가다. 그의 빛나는 고음이 여느 테너와 다른 점은 하이C 이상을 올릴 때 종달새가 하늘로 치오르듯 시원한 수직(垂直)이라는 데 있다. 또 하나의 키워드는 ‘Face in the Voice’. 바로 ‘목소리 속의 얼굴’이다. 성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노랫소리를 접하고 이 가수가 누구인지 얼추 맞힐 수 있는 두 인물이 있다. 마리아 칼라스(1923~1977), 그리고 파바로티다. 그만큼 압도적 개성이 우뚝하다는 이야기다.

나이가 많이 들수록 ‘음(音)⸱미(美)⸱체(体)’, 즉 음악⸱미술⸱체육과 가까이하라는 조언을 들은 적이 있다. 동의한다. 국⸱영⸱수에 함몰됐던 젊은 날에 대한 상쇄요 보상이며 그렇게 해야 교양이 쌓인다. 연전에 모교 여성교우회에 클래식 특강을 갔었다. 막간에 주최 측에서 좀 색다른 순서를 마련했다는 멘트에 뒤이어, 듬성듬성한 머리에 땅딸한 중년남이 등장했다. 휴대용 MR반주기를 틀더니 ‘남몰래 흘린 눈물’을 열창하는 게 아닌가. 간편식으로 떡을 협찬한 두 학번 아래 동문, 그가 다시 보였다. 노래 듣기 전까지 맛없을 것 같아 손이 안 갔던 떡이 먹어보니 달았다. 노래의 힘이다. 아리아의 위력이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은 이토록 힘이 세다.

1979년 라 스칼라좌(座) 오페라단과 협연한 44세의 파바로티, 아디나 역에 그와 동향(모데나, Modena)에 동갑인 미렐라 프레니(1935~2020), 레이놀드 지오반니네티 지휘 녹음을 보통 최고로 친다. 강성곤 음악 칼럼니스트·전 KBS아나운서
도니체티의 고향 베르가모(Bergamo)에 있는 그의 기념비 © 독일 위키피디아
도니체티의 고향 베르가모(Bergamo)에 있는 그의 기념비 © 독일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