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어릴 때 가끔 정전이 될 때가 있었다. 70년대 서울의 풍경. 아직은 느긋함과 희망이 풍성했던 그때는 정전이 되어도 크게 동요될 건 없었다. 기껏 보고 있던 TV를 몇 분간 보지 못하게 되어 아쉬운 정도랄까. 만약 지금 어딘가에 정전이 발생한다면 꽤 큰 불편과 동요와 불만들이 휘몰아치겠지.

어쨌든 그렇게 정전이 되면 왠지 동네 전체가 조용한 수군거림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아, 깜짝이야, 조금 무섭네, 등의 작은 소동이 불러오는, 어딘가 장난기 서린 웅성거림이, 불편과 무서움과는 거리가 먼 키득거림이 있었다.
당신의 그림자는 안녕하십니까? 하루키와 유근택 사이에서
그렇게 정전이 되면 양초를 켜고 벽에 너울거리는 촛불의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두 손을 마주 잡고 갖가지 형태를 만들어내곤 했다. 손으로 만들 수 있는 형태가 얼마나 다양했던가. 개나 새의 모양은 기본이고 창의적이고 머리가 좋은 몇몇은 여러 가지 사물의 형태까지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게 짧은 몇 분 동안 방 벽에는 동물들이 뛰어다니고 새가 날아다니는 그림자의 세계가 펼쳐지곤 했다.

그러다 전기가 들어오면 벽면을 가득 채웠던 환상이 퐁하고 깨져 버렸는데 그림자가 주었던 상상의 큰 기쁨은 너무나도 쉽게 사라지고 잊혔던 듯하다.

그때의 그림자들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 2

남자는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소설가인 남자는 친구를 찾아 빈으로 향하는데 도착해서 어이없는 소식을 듣는다. 친구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남자는 믿을 수 없다. 그 의심은 친구의 애인을 만나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증폭된다.

남자의 이름은 홀리. 미국에 사는 소설가이다. 친구의 이름은 해리 그리고 친구의 애인 이름은 안나.

이 정도의 정보만으로도 시네필들은 이 영화가 무슨 영화인지 단번에 눈치를 챌 것이다. 캐롤 리드 감독의 고전 <제3의 사나이>. 친구의 부름을 받고 유럽으로 날아간 홀리가 해리를 둘러싼 음모와 의심의 소용돌이에 뛰어들면서 빚어지는 스릴러. 고전 흑백의 이 영화는 조셉 코튼, 오손 웰즈라는 대단한 배우들의 호연과 캐롤 리드의 좋은 연출 그리고 안톤 카라스가 맡은 영화음악으로 유명하다. 치타라는 조금은 생소한 악기로 연주되는 ‘해리의 테마’는 멜로디를 들으면 아, 들어 본 적이 있어, 하고 생각할 정도일 것이다.
영화 <제3의 사나이> 포스터 ©다음영화
영화 <제3의 사나이> 포스터 ©다음영화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그곳에 코트를 입고 서 있는 홀리와 저 먼발치에서 걸어오는 안나의 투 샷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안나를 기다리는 홀리, 안나는 과연 홀리 앞에 멈추어 설지 관객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그 장면, 결국 안나는 홀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가 버리고 ... 그 묘한 쓸쓸함이 오래도록 남는 영화이기도 하다.

<제 3의 사나이>.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바로 그림자. 안나와 홀리가 서 있는 벽에 드리워진 두 사람의 커다란 그림자는 두 사람을 덮쳐 오는 의혹에 대한 공포일 수도 있고 해리를 둘러싼 음모와 맞닥뜨린 두 사람의 상황이기도 하다.

어두운 터널 끝, 빛을 배경으로 서 있는 남자의 실루엣 또한 일종의 그림자이다. 검은 형태인 그림자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누구인지 왜인지 무엇인지. 하지만 그 실루엣은 본체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역설적으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기도 하다. 극명한 양면을 가지고 있는 실루엣 또는 그림자.
영화 <제3의 사나이> 스틸컷 ©네이버 영화
영화 <제3의 사나이> 스틸컷 ©네이버 영화
그리고 터널 속에서 추격전을 펼치게 되는 홀리의 얼굴과 몸에 드리워지는 창살의 그림자는 그가 오도 가도 못하게 된 난감한 상황에 빠진 것을 보여주고 결국 홀리와 마주치게 된 해리는 선글라스를 끼고 자신의 눈동자를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진실에 대한 모호함을 남긴다.

오래전에 본 영화이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영화인데 고전 흑백 영화인데도 그림자가 아직도 기억에 있는 것을 보니 나는 어딘가 ‘그림자’에 매혹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 3

나의 90년대는 두 작가의 작품이 함께 했다. 밀란 쿤데라와 무라카미 하루키. 두 사람의 작품은 국내에서 발행되는 족족 기다렸다가 사 읽을 정도로 경도되었는데 최근 하루키의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펼치자마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일각수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을 가지고 있다)>을 떠올렸다.

자매편 아닌 자매편, 속편 아닌 속편. 독자적이지만 이어지는 이야기. 책장을 뒤져 <일각수의 꿈>을 찾아내곤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래. 오랜 시간 끝에 하루키는 다시 또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구나.

두 책을 관통하는 주인공과 주인공의 그림자.
그는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는 일을 하고 있다. 일각수의 두개골. 거기에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꿈을 읽는 일. 그건 그 일을 하게 되는 사람만이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 그렇게 꿈을 읽고 나면 끝인 일. 왜인지 모르지만 해야 하는 일. 남자는 그렇게 일각수의 꿈을 읽는다.

그런데 이 도시에서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림자를 떼어내야 하는 선행 조건이 붙어 있다. 그림자는 남자와 떨어지는 것이 못내 아쉽고 두렵지만 그는 그림자이므로 어찌할 수 없다. 그리고 그림자는 남자를 데리고 도시에서 탈출하려는 의지를 가지게 된다.

남자는 자신의 그림자에게 일면 미안한 마음을 갖지만 스스로의 당면성을 가진 꿈 읽는 일을 해야 하고 또 하고 싶기에 그림자를 떼어낸다. 그렇게 본체와 떨어진 그림자는 조금씩 쇠약해지고.
당신의 그림자는 안녕하십니까? 하루키와 유근택 사이에서
빛 아래 서면 우린 모두 스스로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그림자는 광원에 따라 본체보다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발밑에 웅크리고 있기도 하며 다른 느낌과 이미지를 갖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평소에는 자신의 그림자에게 큰 신경을 쓰며 살지 않는다. 가끔 길게 늘어나 있는 그림자를 보거나 짤막하게 뭉쳐진 그림자를 보게 되면 감흥이 살짝 일어나긴 하지만 자신의 그림자를 특별히 아끼고 사랑한다거나 대단한 관심을 표하며 살아가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그림자가 없어지는 상황이 온다면 또는 하루키의 주인공처럼 그림자를 떼어 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왠지 꽤 큰 고민에 빠져들 것 같다.

그림자는 대체 나에게 어떤 존재란 말인가.
그림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 4

몇 개월 전 갤러리현대에서 유근택전을 보았다. 워낙 작품이 좋고 팬층이 두텁고 잘 알려진 작가이기도 하고 작업 과정이 만만치 않고 작품의 힘이 있어서 많은 분들이 관람한 전시.

나 또한 특별히 몇몇 작품들이 너무나 좋아서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기도 했는데 문득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있었다.

노란 색조의 < reflection >. 갤러리 2층으로 올라서니 바로 맞아 준 작품인데 보자마자 ‘그림자, 하루키’를 떠올렸다. 아무 연관도 없는 세계가 나의 내면에서 충돌한 것이다. 한참을 작품 앞에서 떠날 수 없었다.
유근택 <반영> (2023), 한지에 수묵채색, 144 x 101 cm ©갤러리현대
유근택 <반영> (2023), 한지에 수묵채색, 144 x 101 cm ©갤러리현대
작품은 제목 그대로 ‘반영’이다. 본체의 반영. 햇빛에 의해 지표에 남겨진 그림자와 물에 의해 수면에 드리워진 그림자. 반영체로서의 그림자,들.

앞서 말했듯 그림자는 본체의 반영체이지만 광원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취한다. 과장과 위축, 위장과 드러냄. 개수마저 변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 형태 또한 다르다.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그림자 혹은 반영체. 하지만 어느 순간 그림자 혹은 반영체가 가지고 있는 힘과 영향력이 터져 나올 때가 있다.

유근택의 < reflection >은 그렇게 나의 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끌어내 버렸다. 작품을 본 순간이 스스로에게 멋진 순간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갤러리로 발길을 향한다. 이런 멋진 순간을 위해.
그리고 가끔은 들여다보아야 하겠다. 나의 그림자는 안녕한지.
아, 당신의 그림자는 안녕한가요?

/신지혜 작가·칼럼니스트·멜팅포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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