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이 내리는 커피로 삶의 숨소리를 듣는, 아현동 카페 침묵
아현동 카페 침묵
가난하다는 것은 빈곤한 것이 아니다. 약육강식의, 자신의 일에 대해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프로가 되어 경쟁의 결과물로 얻을 수 있는 풍요로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프로가 되기를 포기하면 맹목적으로 흐르던 삶이 나에게로 돌아온다. 사직서를 내고서 프로의 세계에서 뛰어내린 하월은 좋아하는 음악, 영화, 책에 파묻혀 침묵의 시간 속에 그것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가난은 직장인의 삶을 벗어나 그만큼의 벌이가 없으니, 현실적으로 받아들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능한 한 가난하게 살자는 모토는 오히려 삶의 큰 위로가 됐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그들이 인생에 필요한 장비를 갖추는 사이에"라는 세네카의 말을 삼키며 그는 자신의 인생으로 한 발짝씩 나아갔다.
잊지 못할 몇몇 카페에서의 순간을 그는 아직도 기억한다. 좋은 커피가 무엇인지 깨닫게 됐던 카페 커피스트는 경희궁 인근, 사직동의 고요함을 품고 있었다. 옛 정취가 아련히 남아있는 골목길을 따라 찾은 카페에서 그는 커피에서 나는 산미가 매력적인 것을 알게 됐다. 담배 연기가 자욱해 흡사 지하 도박장의 분위기가 풍길 때도 있었던 홍대 앞 카페 커피 볶는 곰다방에서는, 그곳의 분위기와 음악에 취해 밤낮없이 커피를 마셔대던 사람들과 어울렸다. 훗날 사람들은 그곳에서 ‘청춘과 사랑을 잃고 커피만 마셨다’고 자조하곤 하지만, 그때 곰다방을 지켰던 사람들은 아직도 서로에게 든든한 유대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 카페에서 하월은 자신을 비웠다. 카페에서 그 누구도 그에게 어떤 역할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날 마크 로스코의 전시회에 가서 느꼈던 감정이 딱 그랬다고 그는 말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가득 있는데 나의 이름이 없다는 것이 큰 위로와 감동으로 느껴진 것이다. 그리하여 침묵의 공간이 탄생했다. 누군가 이 침묵의 순간에 위로 받기를 바라면서. 욕심을 부린 것이 있다면 음악에 대한 것이다. 좋아하는 고음악을 더 잘 듣기 위해 오래전 사둔 음향기기를 카페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공간에 배치해 두었다. 체코의 음향기기 회사 자비안(Xavian)에서 만든 줄리에타(Giulietta) 프론트 스피커와 미국산 마란츠(Marantz) 엠프는 조르디 사발(Jordi Savall)이 연주하는 비올라 다 감바의 소리를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낸다. 비올라 다 감바의 소리에는 욕심이 없다. 15세기 비올라 다 감바가 탄생했을 때에는 현을 만들 때 양의 창자를 이용했다. 깊은 울림을 주지만 특유의 작은 음량 때문에 현대에 올수록 이 악기의 소리가 잊힐 수밖에 없었다고 하월은 말한다. 사라질 뻔한 악기가 그 조용한 소리에 빠진 사람들에 의해 다시 태어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진심을 다해 알리아복스 레이블을 비롯한 고음악 연주 음원들을 사 모았다. 그 얘기를 듣고 스피커에 귀를 기울이니 마침 사발의 음반 ‘인간의 목소리(Les Voix Humaines)’에서 누군가의 깊은 숨소리 같은 현의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공간은 커피에게 맡겼다. 침묵의 순간과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카페를 생각하면서 준비한 것이다. 그 중 어떤 공간에서는 지금도 커피를 내리지만, 또 어떤 공간은 한없이 옅게 뿌려진 비올라 다 감바의 소리처럼 사라져갔다. 하지만 추억은 고스란히 그의 손에 남았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 그 기억에 의존해 그는 핸드밀로 커피를 갈아내고, 물을 끓이고 흘려내 한 잔의 커피를 만든다. 카페 침묵은 프로의 공간이 아니다. 최신 트렌드를 좇거나 어느 대회의 우승 트로피를 올려놓은 화려한 경력이 있는 업장도 아니다. 대신 누군가의 관심 속에서 조금은 벗어난, 이제는 사라질지도 모르는 아름다운 것으로 채워져 있다. 고음악이 그렇고 또 아름다움으로 기억된 몇 카페들이 그렇고, 카페가 있는 오래된 골목길이 그렇다. 그것들을 고스란히 모아 공간을 꾸린 감정은 연민에 있지 않다. 사라질 듯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경의이자 작은 연대다. 우리가 좇는 물질적인 것은 어쩌면 허상일지 모른다. 그러니 그는 ‘프로가 되어야 한다’는 세상의 요구에 침묵으로 반기를 든다. 그리고 작은 연대로 위로를 전하기 위해 침묵 속에 커피를 내린다. /조원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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