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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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 없는 도시는 도시가 아니다"

핀란드에는 이런 말이 통용된다. 아무리 지방 소도시라도 라이브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악단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노키아, 자일리톨 등의 브랜드로 친숙한 핀란드가 음악에 '진심'이라는 건 숫자로도 확인할 수 있다. 핀란드 인구는 555만 여명(2022년)으로 대한민국 인구(5175만명)의 10분의 1, 서울 인구(933만명)의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소국(小國)이다. 하지만 핀란드 심포니 오케스트라 협회에 등록된 국·공립 프로 교향악단만 15개로 서울(5개)의 세 배다. "인구 대비 프로 오케스트라 수가 가장 많은 나라"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질적으로는 더욱 압도적이다. 핀란드 라디오심포니 등 헬싱키 기반의 명문 악단 뿐 아니라 각 지역에 양질의 악단이 고루 분포돼 있다. 여기에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수장인 지휘자 양성 교육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27세에 로열콘세르트헤바우(RCO) 예술감독으로 지명된 지휘계의 신성 클라우스 메켈레, 여성 최초로 LA필하모닉 수석 객원지휘자가 된 수잔나 말키 같은 화제의 지휘자들을 비롯해 전(前) 서울시향 음악감독 오스모 벤스케, KBS교향악단을 이끄는 피에타리 잉키넨 등 국내에 잘 알려진 이들까지…. 세계 메이저 악단을 이끄는 핀란드 출신 지휘자들만 어림잡아 열 명은 된다. 클래식계에서는 거센 '북풍'이 일고 있는 상황.

전통적으로 클래식의 본거지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이다. 주류와는 다소 떨어진 핀란드가 어쩌다 예술 강국, 그중에서도 '오케스트라 대국' 또는 '마에스트로의 나라'가 된 걸까. 한국경제신문이 핀란드를 직접 찾아 그 배경을 분석해봤다. 핀란드는 △체계적인 공공 예술교육 △탄탄한 오케스트라 인프라와 연계된 수준높은 전문교육 △미래의 청중을 위한 연구와 실험 등 삼각 편대로 독자적인 예술 강국을 만들어왔다.

핀란드선 전국민이 취미 예술가

지난달 말 한국경제신문이 찾은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는 평일 퇴근 시간인데도 한산했다. 원체 인구 밀도가 낮은데다 궂은 날씨 탓에 번화가인 헬싱키 중앙철도역 인근조차 사람들이 딱히 몰리지 않았다. 딱 한 곳, 공연장 '헬싱키 뮤직센터(Musiikkitalo)'는 예외였다. 헬싱키 명소로 꼽히는 뮤직센터 로비에는 오후 5시부터 콘서트를 보러온 사람들로 가득찼다. 공연장 관계자 카롤리나 피카렌 씨는 "매일 최소 2개 이상의 공연이 열리고, 대부분의 좌석이 찬다"며 "사람들이 오후에 공연장을 찾는 건 이곳에서 자연스러운 일상"이라고 설명했다.
헬싱키 뮤직 센터 ⓒPetri_Anttila
헬싱키 뮤직 센터 ⓒPetri_Anttila
세계적인 지휘자도, 훌륭한 오케스트라도 관객 없이는 무용지물. 핀란드에는 무엇보다 문화·예술적 소양이 높은 국민들이 있다. 역사적으로 20세기 초 핀란드가 러시아로부터 독립하면서 전략적으로 자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했고, 이로인해 정부 차원에서 예술 교육을 체계화한 영향이다. 현재까지 살아남은 여러 지역 오케스트라 상당수가 예술 애호가나 민간에서 시작됐다는 점도 그만큼 예술에 대한 국민적 애정이 컸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핀란드에는 1960~70년대부터 수십년간 틀을 갖춰나간 '예술기본교육'(BEA)이 있다. 예술기본교육은 희망자에 한해 학교 교과수업 외에 실기 중심의 예술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공교육의 일부다. 정부 차원에서 이른바 '전국민 악기 연주하기'를 목표로 한 셈.

정부 및 지자체의 지원 하에 학생들은 강습료의 20% 미만만 지불하면 전문가들로부터 직접 실기 중심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처음엔 음악에서 시작해 현재는 미술, 건축, 무용 등 9가지 분야에서 가능하다. 한국의 방과 후 예술학교와 유사하지만 훨씬 체계적이다. 핀란드기초교육협회에 따르면 핀란드에는 이를 제공하는 부속 교육 기관만 전국 220여 개에 이르고 전국 80% 이상의 지자체가 이를 운영한다. 정부 차원에서 커리큘럼을 만들고 교육 품질을 관리한다. 이렇듯 핀란드에서는 예술은 '럭셔리'가 아닌 '공공재'다. 예술에 대한 접근은 모든 어린이·청소년이 응당 가져야 할 권리로 여겨진다.

'파눌라 사단' 만들어낸 전문 교육

헬싱키 뮤직센터 안쪽으로 들어가면 시벨리우스 아카데미가 있다. 이 아카데미는 대학 수준의 음악 학교로 수많은 지휘 명장들을 배출해낸 명문이다. 핀란드 음악에서 지휘를 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1세대 지휘자 요르마 파눌라(96)는 1973년 이곳에서 전문 지휘자를 양성하는 교육 커리큘럼을 체계화 했다. 당시에는 지휘자를 학교에서 별도로 교육하는 시스템이 거의 없었다. 주로 오페라 극장 등에서 반주를 하며 지휘자에게 개별적으로 배움을 이어갔다.

시벨리우스 아카데미 지휘 수업. 시벨리우스 아카데미 제공
시벨리우스 아카데미 지휘 수업. 시벨리우스 아카데미 제공
이들 수업이 특별한 이유는 '카푸 반디'(지휘 리허설 수업)라 불리는 풍부한 실전 경험이다. 학생들이 톱 오케스트라 지휘를 경험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시벨리우스 음악원의 지휘 커리큘럼은 학생들에게 핀란드의 프로 오케스트라를 많게는 연 4회 이상 지휘할 기회를 준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학원생들에게 서울시향을 지휘할 기회를 학교 수업으로 제공하는 셈이다.

지휘과 학과장 카이사 홀로파이넨(Kaisa Holopainen)은 "모든 핀란드의 지역 오케스트라와 강력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며 "(핀란드는)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모든 악단과 학교가 단합해 제 2의 오스모 벤스케를 키우는 데 참여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미래의 청중 키운다"

핀란드 교육계와 문화예술계는 예술 교육에 대한 역사적 중요성을 기반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새로운 예술과 이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다. 시벨리우스 아카데미 교수이자 BBC 심포니 수석지휘자인 사카리 오라모는 "핀란드에서 클래식 음악은 기본 사항이지만 이를 장기적으로 당연시할 수는 없다"며 미래 세대를 문화예술로 이끌기 위한 유인과 제도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민간에서도 이와 관련한 활발한 지원과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핀란드 문화재단(Finnsh Cultural Foundation)이 지원하고 핀란드 어린이 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아트테스터'는 손꼽히는 성공 사례다. 2017년 시작된 아트테스터는 8학년 학생들을 연 2회 전국 예술 명소(미술관, 박물관, 공연장, 극장 등)를 보내는 프로그램이다. 학생들에게 교통비와 관람비를 제공하며 학생들은 구체적인 피드백을 작성하도록 돼 있다.

이 프로그램은 단순히 아이들을 이끌고 시간을 떼우러 소풍을 가는 차원이 아니다. 이들의 커리큘럼은 전문 예술가, 학생 및 교사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을 통해 신중하게 만들어진다. 80여개 예술 단체에서 제작하는 다양한 작품이나 공연이 포함된다.
ⓒHanna Brotkin /Art Tester
ⓒHanna Brotkin /Art Tester
아트테스터 운영 매니저인 요나스 케스키넨(Joonas Keskinen) 씨는 "프로그램 큐레이션은 다양한 난이도와 장르를 아우르는 체계적인 구성으로 돼 있다"며 "단지 즐기기만 하는 건 예술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예술은) 정답이 없기에 토론하기 좋다"며 "비판적 사고와 창의력을 기를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이들은 일방적인 관람을 넘어 관련 배경지식과 질의응답 시간 등 일종의 현장체험형 강의를 듣게 된다.

현재 2027년까지 예산이 확보된 이 프로그램의 목표는 영구적인 교육의 일부로 자리잡는 것이다. 프로그램에는 매번 6만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누적 40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이를 경험했다.

아트테스터의 가장 큰 목표는 예술의 보편적인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다. 이와 함께 아이들의 리뷰를 기반으로 "미래의 청중이 원하는 문화예술을 종사자들에게 전하는 것" 역시 또다른 주요 목표다. 케스키넨 씨는 이와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현재 순수 예술의 청중들은 주로 나이가 있고 소득이 괜찮은 이들이 대부분이에요. 이를 다변화하고 싶습니다. 학생들에게 경험을 선사해 (예술에)친숙하게 다가가도록 하고, 이들의 리뷰를 데이터화해서 미래의 청중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문화 인프라를 만들고자 합니다. "

최다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