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첫 합법화 이후 낙태권 확대…임신 14주까지 허용
佛 진보 진영, 2022년 美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에 경각심
폴란드·헝가리 등 낙태권 제한 국가에 파급될 수도

프랑스 의회가 4일(현지시간) 세계 최초로 낙태의 자유를 헌법상 기본권에 포함하기로 하면서 여성 인권사에 한 획을 그었다.

1975년 낙태 합법화에 이어 약 50년 만에 이뤄진 역사적 진전이다.

2022년 낙태권 인정 판결을 폐기한 미국을 비롯해 낙태권이 위협받는 나라의 여권 운동에 여파가 미칠 전망이다.

프랑스 헌법에 못박힌 '낙태의 자유'…여권 후퇴 방지에 쐐기
◇ 여성 인권 인식 고조 1975년 합법…매년 20만건
프랑스에서는 1970년대 초까지도 낙태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은 음성적이고 위험하게 낙태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종종 여성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했다.

1967년 피임약이 허용돼 임신에 대한 통제가 이전보다 가능해졌으나 취약 계층에까지 널리 확산하진 못해 여전히 위험한 방식의 낙태가 암암리에 이뤄졌다.

1970년대 들어서며 페미니즘 운동과 가족계획에 대한 인식이 확산하면서 여성이 자기 몸을 통제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낙태 합법화가 공론화하기 시작한 건 '제2의 성'을 통해 여성 억압을 고발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주도로 1971년 4월 예술가, 작가, 정치인 등 343명의 여성이 자신의 낙태 경험을 선언문 형식으로 발표하면서다.

특히 이듬해 성폭행당한 후 낙태한 미성년자 사건을 프랑스 여성 인권 변호사 지젤 알리미가 변호하며(보비니 재판) 낙태 금지법의 문제를 낱낱이 고발하면서 대중의 관심과 인식이 높아졌다.

낙태 합법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들끓는 가운데 1974년 당선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은 중도 우파 출신임에도 낙태법 개혁에 착수한다.

개혁 과제를 책임진 시몬 베이유 보건부 장관은 남성이 절대다수인 프랑스 의회에서 불법 낙태의 위험성을 알리고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설득한 끝에 그해 12월 낙태 합법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른바 '베이유법'으로 불리는 이 법안은 이듬해 1월17일 공포돼 임신 10주 이내의 낙태를 비범죄화했다.

이후 여러 차례의 법 개정으로 낙태 가능 기간이 확대됐다.

2001년 10주에서 12주로 늘어난 데 이어 2022년에는 14주까지 허용됐다.

2016년엔 의사뿐 아니라 조산사에게도 약물을 이용한 낙태 시행 권한을 부여했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해 12월 조산사가 의사 개입 없이도 의료 시설에서 도구를 이용해 낙태 시술을 할 수 있게 추가 승인했다.

프랑스에서 낙태는 건강보험으로 100% 보장된다.

2022년 기준 23만4천300건의 낙태가 시행됐다.

프랑스 헌법에 못박힌 '낙태의 자유'…여권 후퇴 방지에 쐐기
◇ 미국 보고 놀란 프랑스…자기 결정권 보장 수위 높여
낙태가 법적으로 허용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되는데도 프랑스가 낙태할 자유를 헌법에 못 박기로 한 것은 미국의 낙태권 후퇴 움직임이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2022년 6월 보수 성향 대법관이 다수를 차지한 미 연방대법원은 임신 약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한 1973년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했다.

이후 올해 초까지 전국 21개 주에서 사실상 낙태를 금지했다.

미국의 이런 움직임을 프랑스 중도, 진보 진영과 여성계는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이런 일이 프랑스에서는 일어나지 말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곧장 낙태권을 헌법에 명시하기 위한 개헌안들이 발의되기 시작했으나 2022년 11월과 지난해 2월 하원과 상원이 각각 다른 문안의 개헌안을 통과시키면서 1차 개헌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프랑스에서 헌법을 개정하려면 하원과 상원이 동일한 내용의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뒤, 이 안을 두고 국민 투표를 치러야 한다.

다만 대통령이 헌법 개정안을 양원 합동회의에 제출하기로 결정하면 국민투표는 생략할 수 있다.

이 경우 양원 합동회의에서 재적 의원 5분의 3 이상의 찬성을 얻으면 개헌이 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헌법 개정은 대부분 의회 표결로 승인됐다.

프랑스 헌법에 못박힌 '낙태의 자유'…여권 후퇴 방지에 쐐기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후자를 택했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 1월 헌법 제34조에 '여성이 자발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을 법으로 정한다'는 문구를 추가한 개헌안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제출했다.

이후 하원은 토론 끝에 그달 30일 찬성 493 대 반대 30으로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한 달 뒤인 지난달 28일 중도 우파가 장악한 상원 역시 찬성 267 대 반대 50으로 넉넉히 개헌안을 승인했다.

이 과정에서 제라르 라셰 상원 의장이 "헌법은 사회적 권리를 나열하는 카탈로그가 아니다"라며 낙태 자유의 헌법 명시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기도 했으나 여론의 거센 요구와 대세를 뒤집진 못했다.

여론조사업체 유고브가 2일 발표한 조사(2월26∼29일) 결과에 따르면 프랑스인의 66%가 낙태를 헌법에 명시하는 것에 찬성한다고 응답했다.

프랑스 헌법에 못박힌 '낙태의 자유'…여권 후퇴 방지에 쐐기
세계 최초로 헌법에 낙태할 자유를 명시함으로써 프랑스는 낙태권 보호에 가장 앞섰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프랑스 여성들로서는 자기 신체에 대한 통제권을 최상위 법의 기본권 차원에서 보장받게 됐다.

어느 세력이 의회 다수파를 차지하더라도 일반 법률 개정으로 낙태할 자유를 제한하거나 최악의 경우 폐지할 가능성이 대폭 줄어든 셈이다.

다만 실질적으로 달라지는 건 없다.

기존의 낙태 허용 기한 등 규정도 유지된다.

안샤를렌 베지나 공법학 교수는 TF1에 "이번 개헌은 여성의 권리를 위한 상징적인 조치에 불과하다"며 "이 권리가 헌법에 명시됐다고 해서 반드시 실효적인 보장 측면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번 개헌은 프랑스 내부에 그치지 않고 전 세계의 여권 운동에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낙태가 대선의 주요 쟁점이 된 미국뿐 아니라 낙태에 대한 권리를 제한하는 유럽 일부 국가로도 확대할 가능성이 크다.

가톨릭 전통이 강한 폴란드는 성폭행이나 근친상간, 또는 산모 생명이 위험한 경우에만 낙태가 허용된다.

폴란드 헌법재판소는 2020년 태아 기형에 따른 낙태도 '위헌'으로 결정해 여론의 반발을 샀다.

헝가리 우파 정부는 2020년 9월 임부가 낙태하기 전 태아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법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여성의 낙태할 자유의사에 정부가 '강요된 모성'이라는 장애물을 추가한 셈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