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미국 새너제이에서 열린 '인텔 파운드리 서비스 2024' 행사에서 방진복을 입은 인텔 관계자들이 도약을 상징하는 군무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REUTERS
지난달 21일 미국 새너제이에서 열린 '인텔 파운드리 서비스 2024' 행사에서 방진복을 입은 인텔 관계자들이 도약을 상징하는 군무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REUTERS
최근 수년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시장의 경쟁 구도는 대만 TSMC 1위, 삼성전자 2위였다. 1위와의 격차(약 40%포인트) 컸지만, 삼성전자는 'TSMC의 대안'으로 평가됐다.

앞으로 상황이 좀 바뀔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을 대표하는 반도체기업 인텔은 최근 사업 부문을 반도체 설계·개발을 담당하는 '인텔 프로덕트 그룹'과 칩 생산을 맡는 '인텔 파운드리 그룹' 두 개로 나누기로 했다. 지금까지 인텔의 핵심 사업이 중앙처리장치(CPU) 개발·생산·판매였다면 앞으로는 '파운드리가 될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룹별로 실적을 집계해 공표하기로 했다. 올 1분기부터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인텔이 올해 1분기부터 파운드리 2등

첫 번째는 파운드리의 독립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파운드리는 공장이 없는 팹리스들의 주문을 받아 칩을 생산해주는 사업이다. 팹리스들이 인텔의 파운드리에 칩 생산을 맡기려면 설계 단계부터 협업해야 한다.

인텔과 CPU·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에서 경쟁하는 AMD, 엔비디아 등은 팹리스다. 칩 생산을 위해선 파운드리에 맡겨야 한다. 지금까진 주로 TSMC를 이용했다.

인텔을 이용하는 건 쉽지 않다. 기밀 유출 우려 때문이다. 실제 애플도 경쟁사인 삼성전자의 파운드리를 전혀 활용하지 않는다.

인텔이 파운드리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건 이런 의구심을 줄이려는 목적이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열린 'IFS 2024' 기자간담회에서 "경쟁사 CEO인 리사 수(AMD), 젠슨 황(엔비디아)도 파운드리 고객으로 유치하고 싶다"고 말했다.

실적을 별도로 집계하면 파운드리 순위도 올라간다. 인텔은 CPU, GPU를 설계하는 프로덕트 그룹이 맡긴 생산 물량도 파운드리 그룹 실적에 넣기로 했다. 자사 중앙처리장치(CPU) 사업부 등이 맡긴 생산물량도 파운드리 실적에 넣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현재 1%인 인텔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10%대 중반으로 치솟아 삼성을 누르고 TSMC에 이어 업계 2위가 된다. 인텔 관계자는 "1분기 2위가 확실시된다"고 강조했다.

삼성은 경쟁자로 거론도 안해

업계에서는 ‘업계 2위 타이틀’이 파운드리 고객사 유치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인텔이 회계 처리 방식을 변경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삼성전자도 2017년 파운드리사업부를 독립시키면서 내부 매출을 포함했다. 단숨에 2위로 떠올랐다. 대만 UMC, 미국 글로벌파운드리즈 등 순수 파운드리기업들은 "삼성전자 파운드리 매출엔 내부 일감이 포함돼있다"며 깎아내렸지만, 시장의 인식은 '2위 삼성'으로 굳어졌다. 인텔도 이런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인텔은 원래 IFS 2024에서 ' 올해 1분기부터 2위가 된다'는 사실을 떠들썩하게 알리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2030년부터 2위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텔 관계자는 이에 대해 "2030년 2위는 온전히 '외부 고객 매출' 만으로 2위가 되겠다는 목표를 제시한 것"이라며 "내부 매출을 합치면 1분기부터 2위가 맞다"고 설명했다.

경쟁자로 삼성을 언급하지 않는 모습도 보였다. TSMC에 대해서 '훌륭한 경쟁자이자 동업자'라고 평가한 것과 대조적이다.

1.4nm에 이어 2027년에 '1nm 공정'도 시작

단순히 실적만 바꾸는 게 아니다. 인텔은 파운드리 공정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텔은 올해 2nm와 1.8nm 공정을 시작한다. TSMC, 삼성전자의 2nm 도입 시기는 2025년이다.

2027년부터 1.4nm 공정에서 제품을 양산하겠다는 계획도 공표했다. TSMC, 삼성전자와 같은 시점이다. 하지만 인텔이 내부에서 목표로 하는 1.4nm 공정 본격화 시기는 2026년이다. 현재까지 어떤 기업도 공개하지 않았던 1nm 공정 도입 시기도 '2027년'으로 잡았다. 인텔은 이런 공정 로드맵을 고객사 대상 비공개 세미나(당일 공개로 변경)에서 밝혔다.
팻 겔싱어 인텔 CEO(왼쪽)와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지난달 21일(현지시간) 미국 새너제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인텔 파운드리 서비스 2024’ 노변담화에서 인공지능(AI) 반도체 조달 방안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팻 겔싱어 인텔 CEO(왼쪽)와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지난달 21일(현지시간) 미국 새너제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인텔 파운드리 서비스 2024’ 노변담화에서 인공지능(AI) 반도체 조달 방안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인텔의 공격적인 파운드리 사업 진출에 대해 반도체 업계의 의견은 엇갈린다. '찻잔 속 태풍'에 그칠 것이란 주장이 나온다. 인텔은 파운드리 업력이 길지 않기 때문에 '고전'할 것이란 얘기다.

국내 반도체기업 관계자는 "인텔은 CPU 세계 1위 자리를 수십 년 지키면서 '갑(甲)'의 위치에 익숙해진 기업"이라며 "고객 대상 서비스가 중요한 파운드리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텔이 2010년대 중반 이후 10nm 이하 초미세공정 도입에 어려움을 겪으며 TSMC에 제조 패권을 내준 것도 인텔에 대한 의구심이 없어지지 않는 이유다. 이 기간 인텔의 경쟁사 AMD는 TSMC를 활용해 고성능 CPU를 출시하며 PC용 CPU 시장 점유율을 20% 이상으로 올렸다.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경쟁력 무시 못 해 ...수율도 상승 중

파운드리 경쟁사 삼성전자의 존재도 인텔의 부담이다. 삼성전자가 최근 1~2년간 수율 문제로 고전하고 있지만, 2017년 사업부 독립 이후 쌓아온 노하우가 만만치 않다는 평가도 나온다. 수율과 별개로 3nm 등 공정 개발 경쟁에선 삼성전자는 TSMC와 대등한 모습을 보인다.

고객사의 주력 칩을 생산해본 노하우도 쌓이고 있다. 퀄컴, 엔비디아 등을 고객사로 두고 있고 최근엔 테슬라, 암바렐라 등 자율주행 칩 팹리스의 최첨단 칩 생산도 맡았다. 지난달 27~29일 일정으로 방한했던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도 "삼성은 거대 파운드리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고 세계 경제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며 "파운드리는 삼성과의 협력 포인트"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 화성의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클린룸에서 직원이 웨이퍼 원판 위 회로를 만드는 데 쓰는 기판인 포토마스크를 점검하고 있다. 한경DB
경기 화성의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클린룸에서 직원이 웨이퍼 원판 위 회로를 만드는 데 쓰는 기판인 포토마스크를 점검하고 있다. 한경DB
삼성전자의 약점으로 꼽혔던 초미세공정 수율(생산품에서 양품의 비율)도 개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주력인 4nm 공정 수율은 60~70%까지 올라왔다. 이를 기반으로 생산한 스마트폰용 프로세서 '엑시노스 2400'의 성능에 대해선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3nm 2세대 공정도 수율 정상화에 힘을 쏟고 있다. 올 연말께엔 3nm 2세대 공정 수율도 정상 수준까지 올라갈 것이란 전망도 있다.

반론도 나온다. 최근 인텔이 공정 개발에 성과를 내고 있어서다. 고객사 서비스와 관련해서도 "개선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인텔의 파운드리 고객사인 지멘스, 미디어텍 고위 관계자들은 IFS 2024에 직접 나와 인텔과 협업 성과를 공개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미국 정부의 지원이 인텔 파운드리의 확실한 성장 동력으로 꼽힌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은 IFS 2024 화상 축사를 통해 "인텔은 미국의 챔피언"이라며 "실리콘(반도체)을 실리콘밸리에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상 미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