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그분] '새마을운동 상징' 하사용씨 "이면지로 봉투 만들어요"
'새마을운동' 하면 생각나는 사람 하사용(河四容)씨. 만 93세인 그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지난달 27일 찾아간 충북 청주시 흥덕구의 자택. 최근 기력이 달려서 며칠간 병원에 입원해있었다는 하씨는 더는 농사를 짓지 못하지만, 요즘도 멈추지 않는 일이 한 가지 있다고 했다.

철 지난 달력이나 이면지로 편지 봉투를 만들어서 주변에 나눠주는 것.
기자에게도 선물이라며 수십장을 줬는데 폭이 좁았다.

이유를 묻자 "이 봉투에 돈을 담아서 축의금이나 부조로 내고 나면 어차피 봉투는 버릴 것 아닌가요? 최대 10만원을 담을 만큼이면 되지 그 이상 크게 만들 필요가 없으니까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요즘그분] '새마을운동 상징' 하사용씨 "이면지로 봉투 만들어요"
이면지로 만드는 봉투의 폭을 좁게 할 만큼 철저한 그의 절약 정신은 어디서 생긴 걸까.

하씨는 1930년 4월25일 충북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현 청주시 흥덕구 정중연제로)에서 8남매의 4남으로 태어났다.

정중리는 의지할 데 없는 가난한 이들이 땅을 파서 떼로 지붕을 덮고 사는 마을이라고 해서 '뗏집거리'로 불렸다.

초등학교(강외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지만, 월사금 50전을 못 내서 2학년 때 퇴학당했다.

"어려서 밥을 모르고 살았어요.

엿찌끼나 술찌끼가 고작이었죠. 가난이 너무 무서웠어요.

"
동냥질부터 시작해서 넝마주이, 엿장수, 나무장사 등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하면서 해방을 맞고 6·25 전쟁도 겪었다.

그가 하고 싶은 일은 당시 화교(華僑)들이 주로 하던 채소 농사였지만 땅이 없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딸(신경복)을 만나 냉수 한 사발 놓고 혼례를 치른 직후 춘천 가서 3년 동안 머슴살이를 했다.

새경으로 쌀 17가마를 받아서 돌아와 보니 아내는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다.

1957년 냇가 땅 270평을 사고, 한쪽에다 두평 남짓한 움막도 지었다.

인근 조치원읍에 가서 거름을 퍼오다가 읍내 사람들에게 뺨을 맞고 거름통이 깨지는 설움도 겪었다.

[요즘그분] '새마을운동 상징' 하사용씨 "이면지로 봉투 만들어요"
농부 하사용은 어린 시절 화교들이 채소 위에 거적을 덮어준 걸 기억하고 밭에 채소(오이)를 심은 후 콩기름 바른 종이를 씌웠다.

"보온을 해주니까 20일 내지 한 달은 빨리 자랐죠" 그가 1963년 충북 농촌진흥원에서 배운 비닐하우스 제조법을 빨리 받아들인 배경이기도 했다.

조치원시장에 채소를 내다 팔아서 번 돈은 한 푼도 헛되이 쓰지 않고 저축했고, 그 돈으로 다시 땅을 샀다.

1959년 700평, 1963년 1천평, 1970년 3천평으로 늘렸고, 나중엔 1만2천평으로 불어났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다른 집 비닐하우스는 모두 쓰러졌지만, 하씨는 밤새 눈을 치워서 한 동도 쓰러트리지 않았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해인 1970년 11월11일 '제2회 전국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 경진대회'에 참석해서 사례 발표를 하고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동탑산업훈장을 받았지만 포상금 1천만원은 받기를 거부했다.

1천만원이면 당시 한 푼 두 푼 모아 땅 3천평을 갖고 있던 하씨가 2만평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주변에서 '불경죄'라고 해서 꺼림칙했지만, 남에게 동냥해서 굶주림을 면할지언정 10원도 빌린 일이 없다는 자부심만은 허물 수 없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에게도 "내 땅 다 팔아야 회장님 자동차 한 대 값밖에 안돼요.

그런데 내가 부자라고 하는 그 뜻은 나는 빚이 없습니다.

회장님은 이거 다 회장님 돈 아니잖아"라고 한 그였다.

하씨는 결국 자기 힘으로 땅을 1만2천평으로 불렸고, 소원대로 자식들 입에 밥을 넣어주고 공부도 시켰다.


1971년 가을 농림부에서 새마을지도자 교육계획을 청와대에 올리자, 대통령이 하씨를 넣으라고 강사 명단을 수정해서 돌려보냈다.

이때부터 하씨는 최근까지 3천500회 이상 강의했다.

중국은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 주석이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해서 중국의 신농촌 건설을 추진하면서 심지어 2007년 4월 하씨의 스토리를 소설 '쉰멍(尋夢·꿈을 찾아서)'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2015년에는 몽골에 가서 강연했다.

2006년에는 조치원 읍내 관공서나 은행을 돌며 일회용 종이컵을 주워다가 채소 모종을 심어서 팔았고, 이 돈을 모아서 '올해의 저축왕'에 선정되며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2016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폭이 좁은 봉투를 만든다는 그에게 기자가 물었다.

"누가 '다 쓰지도 못할 돈을 뭐 하러 그렇게 지독하게 모으셨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라고. "내가 쓰려고 돈을 모았나요? 밥 구경도 못 하는 가난이 무서워서, 내 새끼들은 굶기지 말아야겠다고 애를 쓴 거죠. 소원대로 자식들 입에 밥 넣어줬고, 공부도 시켰죠. 내 형제들 집도 한 채씩 지어줬죠. 이만하면 성공한 거 아닙니까.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