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에포크 시대 파리가 모든 이들에게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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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전유신의 벨 에포크
-벨 에포크 시기 하녀의 일상
-벨 에포크 시기 하녀의 일상

‘리슬런트 성의 꿈같은 창문’은 홀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여성의 뒷모습을 포착한 작품이다. 창문 밖에는 꽃이 만발해 있고 봄 햇살처럼 느껴지는 온화한 빛이 창을 통해 실내로 비쳐들고 있다. 창밖을 바라보는 이 여성은 리슬런트 성에서 일하는 하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갖 집안일을 쉴 틈 없이 해내야 하는 그에게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돌리는 이 순간은 꿈결처럼 달콤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아헨의 이 작품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또 다른 하녀의 이야기를 다룬 프랑스 영화 ‘어느 하녀의 일기’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주인공인 셀레스틴도 아헨의 그림 속 하녀처럼 검정색 드레스에 흰 앞치마를 두른 전형적인 하녀 복장을 주로 착용하고 있다. 옷차림은 단출하지만 셀레스틴은 미모가 뛰어난데다 도도한 성격으로 어디에서나 인기가 많은 매력적인 여성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직업 소개소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소개받아 파리 근교의 새 일터로 향하는 셀레스틴이 등장한다. 영화의 초반부만 보면 주인공 셀레스틴은 비록 하녀로 일하지만 직업을 가진 독립적이고 현대적인 여성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가 새로운 일터에 도착한 이후의 상황은 무척 다르다. 집주인은 그 집을 거쳐 간 하녀들을 모두 추행하고 심지어 임신까지 시키는 일을 반복하는 후안무치한 인간이다. 그는 새로 온 하녀 셀레스틴을 보자마다 희롱하기 바쁘고, 그의 부인은 셀레스틴을 괴롭히는 것으로 남편에 대한 불만과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집주인의 추행 시도를 순간순간 모면하는 일과 안주인의 괴롭힘을 견디는 것이 하녀 셀레스틴의 일상인 것이다.

미르보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어느 하녀의 일기’도 하녀 셀레스틴의 시선을 통해 아름다운 시절이라 불렸던 벨 에포크의 추악한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당시 직업을 갖고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여성은 대부분 셀레스틴과 같은 하위계층의 여성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들은 돈을 벌기 위해 직업을 가질 필요가 없는 대신 사회적 활동 역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남편이나 아들과 같은 남성 가족과 동행하지 않은 채로 혼자 외출하는 것도 금기시되었다. 때문에 남성 동행인 없이 홀로 파리 시내를 오가는 여성들은 대부분 하위계층 출신들이었었다. 부르주아 남성들에게 이들은 함부로 다루어도 되는 계급이 낮은 대상이자 돈벌이를 위해 매춘도 마다하지 않을 여성, 즉 매춘부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오늘날에는 전문직으로 여겨지는 가수나 발레리나 같은 직업을 가졌던 당대의 여성들도 이 시기에는 그저 돈벌이가 필요한 하위계층의 여성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발레 공연장의 경우 부르주아 남성들이 입장권과 함께 무용수들의 탈의실과 연습실에 들어갈 수 있는 통행증을 구입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였다. 발레리나들의 일터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부르주아 남성들의 유희의 장소였던 셈이다. 이 시기에 발레를 주제로 한 그림을 주로 그렸던 인상주의 미술가 에드가 드가의 작품은 당시 발레리나들의 이와 같은 위상에 비추어 보면 새롭게 볼 여지가 많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