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철이는 기계 인간이 되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려면 프로메슘으로 가는 은하철도999를 타야 하는데 비싼 요금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 때 메텔이 나타나 그에게 승차권을 건네며 동행을 권유한다. 그렇게 철이는 은하철도999를 타고 우주를 여행하며 성장한다.

어린 시절의 어느 시기는 아침 일찍 방영하던 <은하철도 999>로 채워져 있다. 때론 마음 아프게 때론 행복하게 때론 심오하게 때론 긴박하게 펼쳐지던 각각의 에피소드는 감동을 쌓아 주었고 철이의 개인사와 메텔과 동료들의 개인사가 얽히고 설키면서 이면의 큰 세계관을 접하고 눈을 크게 떴던 그 시절의 기억….

“철아, 나는 너의 청춘의 어스름한 그림자 ...‘라고 말하며 이별을 고하던 메텔의 모습은 그 멋진 대사와 함께 오래도록 마음 깊이 자리하고 있었고 오래도록 진행하던 <신지혜의 영화음악> 마지막 방송, 청취자 분들께 드리는 마지막 인사로 인용할 정도로 나의 인생작 중 하나이다.

# 2

시간이 더 흐르고 애니메이션을 찾아보게 되었다. SF, 판타지부터 감동 가득한 작품들까지. 이렇게 좋은 작품들이 많구나, 감동하고 감탄하며 보낸 시절이 있었다.

그 때 만난 작품 중에 <첼로 켜는 고슈>가 있다.

악단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고슈이지만 어딘가 마음이 담기지 않은 어설픈 실력 때문에 지휘자에게 쓴소리를 듣기 일쑤인 고슈. 밤마다 첼로 연습을 하기로 한다. 하지만 재능이 없는지 그다지 실력이 느는 것 같지도 않고 스스로의 연주에도 만족할 수 없다.

그런 고슈에게 작은 골칫거리가 생긴다. 첼로 연습해야 할 시간은 부족한데 밤마다 동물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고양이가 찾아오고 뻐꾸기가 찾아오고 너구리가 찾아오고 생쥐가 찾아오고….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작은 동물들과 첼로 연습을 한 고슈의 실력이 확 늘었다. 작은 동물들과 함께 했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보고 나니 마음이 밝아지고 따뜻해진 작품 <첼로 켜는 고슈>. 알고 보니 미야자와 겐지의 소설이 원작이다.
<첼로 켜는 고슈:올려다보는 뻐꾸기(2012)>. 후지시로 세이지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
<첼로 켜는 고슈:올려다보는 뻐꾸기(2012)>. 후지시로 세이지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

# 3

미야자와 겐지. 그의 소설 중 대표작이 <은하철도의 밤>이다. 나의 어린 시절을 감싸 주던 <은하철도 999>의 모티브가 된 작품을 알려져 있는 바로 그 소설. (원작은 아니다. 모티브가 되었을 뿐)

책을 사서 읽었다. 조반니와 캄파넬라의 이야기. 함께 은하철도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되면서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 이토록 맑고 따사로운 느낌이라니. 그렇게 나는 또 겐지의 팬이 되었다.
미야자와 겐지 동화 ‘은하로의 여행(1978)’. 후지시로 세이지.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
미야자와 겐지 동화 ‘은하로의 여행(1978)’. 후지시로 세이지.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

# 4

지금이야 인터넷이 보편화 되어 있고 그 이전의 일상은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이지만 생각해보면 인터넷이 일상화 된 것은 20년이 좀 넘을 뿐이다 (라고 써놓고 보니 20년이나 되었구나!).

인터넷 사이트가 생겨날 무렵 모 매체에 애니메이션 칼럼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고 1주일에 1편씩 올리던 때가 있었다. <천공의 성 라퓨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사일런트 뫼비우스>, <인어의 숲/ 인어의 상처> 등등 거의 70편 쯤 쓴 것 같다. (그때 그 사이트와 원고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정말 애석한 일이다.)

당시 마지막으로 쓴 칼럼이 아마도 <겐지의 봄>이라고 기억 된다. 미야자와 겐지. 그의 짧고도 빛나는 삶을 애니메이션으로 담아낸 것인데 고양이를 의인화했던 기억이 있다.

미야자와 겐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글을 쓰고자 했던 그는 집안과 멀어지고 소설을 집필하지만 병을 얻어 너무나 일찍 세상을 떴다. 그의 소설들은 그의 생전 거의 출간되지 못했고 <은하철도의 밤> 또한 부분 부분이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온기를 담은 소설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고 몇 편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잔잔한 감동을 전해 주었다.

바로 그의 이야기가 담긴 <겐지의 봄>을 보면서 몇 번이고 DVD를 멈춰야 했다. 마음이 너무나 울려와서 말이다.
<미야자와 겐지 실루엣(2016)>. 후지시로 세이지.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
<미야자와 겐지 실루엣(2016)>. 후지시로 세이지.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

# 5

세월이 더 흐르고 후지시로 세이지의 전시회가 국내에서 열렸다. 2021년 그의 ‘빛과 그림자의 판타지’전.

아마도 미셸 오슬로의 애니메이션을 보신 분들이라면 바로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종이를 오리고 붙이고 빛을 비추고 ... 그렇게 창조된 세계는 글자 그대로 아름다웠다. 시간과 노력과 재능과 마음이 들어간 작품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 말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는 또다시 미야자와 겐지와 만난다. 후지시로 세이지는 미야자와 겐지의 소설과 만나 카게에 (그림자 놀이)작가로 눈을 떴다고 한다.

후지시로 세이지는 말한다.

“겐지의 동화는 이전에 읽었던 것과 달랐다. 단순한 동화라기보다 기도(祈禱)의 동화라고나 할까. 그 바탕에 뭔가 깊은 기원과 기도가 담겨 있다”1)

아, 이것이었구나. 내가 받았던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 속 감동이 이것이었구나. 후지시로 세이지의 말대로 그 감동은 바로 ‘기도’였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따뜻하고 행복하기를 바랐던 겐지의 기도. 그리고 그 기도를 빛과 그림자로 형상화 한 세이지의 기도. 그 아름다운 마음들의 기도가 나의 마음에 감동으로 이어졌던 것이었다.

그 해 전시에서 ‘바람의 마타사부로’, ‘은하철도의 밤’, ‘주문 많은 요리점’ 등의 작품을 보면서 오래 전 읽었던 글이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형상과 색채로 새로운 감동을 주었다.

# 6

그리고 2024년. 후지시로 세이지의 ‘오사카 파노라마’전이 시작되었다.

작가는 “빛과 그림자는 태양과 달, 불과 같은 자연과 우주의 근원이고 인간과 통하는 힘을 가진다”고 말하는데2) 전시를 보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작품은 작가의 마음의 향방을 보여준다. 작품에는 작가가 추구하는 바, 작가의 마음의 온도, 작가의 마음이 향하는 곳이 담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고 누군가의 작품을 보고 압도당하며 누군가의 작품을 보고 즐거워지고 누군가의 작품을 보고 숙연해지는 것이 아닌가.

역시나 이번 전시에서도 반가운 작품들이 보인다. 이전 전시에서 보지 못했던 ‘미야자와 겐지 실루엣’은 개인적으로 너무나 반가웠고 ‘나메토코산의 곰’, ‘눈 건너기’, ‘오츠벨과 코끼리’, ‘달밤의 전봇대’ 등 겐지의 글을 바탕으로 창조된 작품들은 아련하고 아늑하다.

또한 <첼로 켜는 고슈>의 장면들이 연작으로 보여 지고 있어 소설과 애니메이션으로 이 작품을 접했던 사람이라면 반갑고 뭉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눈 건너기’ (1997). 후지시로 세이지.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눈 건너기’ (1997). 후지시로 세이지.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

# 7

아름다운 작품을 보고 나면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리고 다짐하게 된다. 나도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아름답게 살아가리라고 말이다. 물론 그렇게 고매하게 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시시때때로 맑고 투명한 정서를 접해 가며 스스로의 마음을 깨끗하고 맑게 유지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훌륭한 작품, 감동적인 작품을 남긴 작가들에게 드리는 경의의 한 표현이지 않을까.

글. 신지혜 (작가, 칼럼니스트, 멜팅포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 참고도서

1) 후지시로 세이지 <빛과 그림자의 판타지전> 도록 (2021)
2) 후지시로 세이지 탄생 100주년 기념 <오사카 파노라마전> 도록 (2024)


이미지제공 :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