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짭짤한 바닷바람이 부는 도시 통영’은 ’전복과 해삼이, 도미와 가재미가 풍성하게 잡히는’ 황금 어장이었다. 시인 백석은 친구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 박경련에게 한눈에 반해 그녀의 고향인 통영으로 향했다. 하지만 두 번의 엇갈림과 절친한 친구의 배신으로 사랑은 이뤄질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통영의 풍경은 백석의 마음에 남아 세 편의 시를 남겼다. 그의 시에서 통영은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어대는’ 곳이며,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었다.

그곳은 바다 건너 일본과 대마도가 지척에 있고, 창원과 여수로 길이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기도 했다. 하여 임진왜란 이후 해군본부인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됐다. 이때부터 거제현에 속한 작은 항구 두룡포는 통제영의 이름을 빌려와 통영이라 불리게 됐고, 항구에는 삼남 지방의 세곡과 화물을 나르는 조운선과 화물선이 빈번하게 드나들었다. 통제영에는 군 시설 외에도 부채와 대발, 갓 등을 생산하는 12공방이 문을 열어 한양에 올리는 진상품을 만들었다. 여기에 화폐를 생산하는 주전소까지 있었으니, 통영은 말 그대로 하나의 작은 국가나 다름없었다.

항구가 번창하니 어장에는 사람과 돈이 모였다. 또, 사람과 돈이 모이니 문화와 예술이 꽃을 피웠다. 도시에는 풍요로움이 흘러넘쳤고, 이 풍요로움 속에 소설가 박경리, 시인 김춘수, 작곡가 윤이상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등장했다. 1994년 한일어업협정으로 어장이 무너지기 전까지, 통영은 아주 오랜시간 영광과 번영의 도시였다.
삼문당 커피에서 바라본 풍경
삼문당 커피에서 바라본 풍경
아직도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표구사 간판은 통영의 오랜 영광을 상징하는 흔적이나 다름없다. 표구사는 단순히 병풍과 족자를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을 보존하거나 복원하는 일을 하는 곳이다. 작품 뒤에 풀을 묻힌 한지를 바르고 건조하기를 반복하는 배접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까다로운 기술을 요한다. 수많은 예술작품이 번영한 도시에 모여들었으니 그것을 보존하고 보관하고 완상하기 위해서 표구사는 꼭 필요한 곳이었다. 삼문당커피 윤덕현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운영하는 표구사에 동네 예술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던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영광의 시절이 속절없이 저물어가던 때에도 아버지의 일이 얼마나 귀중한지 알지 못했다.
백석도 박경리도 사랑한 통영, 아버지의 표구사를 카페로 바꾼 아들
윤덕현 대표가 통영을 다시 찾은 것은 마흔이 넘었을 때다. 스무 살이 되어서는 대학생활을 위해 진주에 머물렀고, 극단에 들어가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보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부산에 정착했고 결혼도 했다. 진부한 얘기지만 사람과 커피가 그에게 통영을 생각케 했다. 우연한 기회에 창원에서도 꽤 외진 곳에 있는 몬스터커피에 방문했던 것인데, 늦은시간에도 사람들이 매장을 가득 채운 모습을 보면서 커피와 공간이 주는 힘을 몸소 느꼈다.

아버지의 표구사와 어린 시절 통영의 거리가 떠오른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리하여 비슷한 공간을 만들어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2015년 통영으로 돌아와 강구안에 카페 수다를 열었다.
백석도 박경리도 사랑한 통영, 아버지의 표구사를 카페로 바꾼 아들
그간 통영의 어장은 이전과 다르게 쇠퇴하고 있었지만, 고속도로가 개통됐고 케이블카도 생기는 등 변화가 일었다. 통영국제음악제나 프린지페스티벌 같은 축제가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영화의 배경으로도 등장하기도 했다. 또 강구안의 꿀빵과 충무김밥을 파는 가게 앞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했다. 관광의 도시로 탈바꿈한 통영이 옛 영광을 되찾는 듯싶었다. 번잡한 대로에서 한 블록 떨어진 카페 수다에도 심심치 않게 사람들이 모였다. 하지만 KTX 개통으로 성장한 여수와 순천이 새로운 관광 도시로 떠오르고, 여행 트렌드도 빠르게 변해 통영을 찾는 인파도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길 수 없는 운명 같은 그 흐름에도 윤대표는 통영을 떠나지 않았다. 먼 길을 돌아 다시 통영으로 왔으니, 떠나지 않고 지키는 길을 택했다. 통영을 함께 지키는 예술인과 자영업자가 지속 가능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인디페스티벌을 만든 것도 이때부터였다.

비슷한 시기에 아버지의 표구사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받았다. 임대 문제로 카페 수다의 문을 닫게 돼, 마침 문을 닫으려던 아버지의 표구사에 카페를 옮겨 연 것이다. 그렇게 장돌뱅이 예술가들이 모여들곤 했던 표구사가 커피 향을 풍기는 통영 인디 예술인들의 거점이 됐다.

윤대표는 본래 아버지가 배접을 하던 표구사 공간인 1층을 커피 로스팅 작업을 하는 곳으로 꾸렸다. 2층은 표구사의 갤러리 역할을 하던 곳으로, 최근까지는 법무사 사무실에 임대 하였던 공간이었다. 그는 이곳을 손님을 맞는 곳으로 만들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치 연극 무대를 연상케 하도록 했다. 아버지의 가게에 있었던 서화와 병풍, 족자는 무대의 소품처럼 각자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바리스타가 출입문 맞은편의 미닫이문을 열고 바에 들어서면 연극이 시작되는 구조다. 그 무대에선 아주 오래전 영광의 시절의 추억부터, 새로운 통영을 만드는 예술인들의 이야기가 커피 한 잔과 함께 펼쳐진다.
백석도 박경리도 사랑한 통영, 아버지의 표구사를 카페로 바꾼 아들
백석도 박경리도 사랑한 통영, 아버지의 표구사를 카페로 바꾼 아들
가게를 물려받고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면서 윤대표는 아버지가 그곳을 지켜왔던 시간을 생각했다. 표구는 예술이 더 오래도록 그 아름다움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었다. 때로는 그 작품은 역사적 의미를 담은 유물이기도, 장돌뱅이 예술가의 혼이 담긴 작품이기도 했다. 아름다움을 지키는 표구사의 일은 어장을 키워가는 일만큼이나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중요한 요소였다. 다시 통영에 돌아온 윤대표에게 커피와 연극은 아버지가 해 온 표구사의 일과 일맥상통했다. 모두 일상의 어떤 아름다운 장면을 포착하고 여럿이 오래 즐길 수 있는 결과물로 풀어내는 일이다. 아버지의 일은 아름다움을 잘 다듬고 틀을 더해 보존해 나가는 작업이며, 아들의 일은 그것을 무대에 올리거나 알맞은 정도로 볶아내는 작업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짭짤한 바닷바람 같은, 언덕에서 마주한 영롱한 풍경 같은 ‘통영 블렌드’ 한 잔을 들이켜니 윤대표가 그리려고 했던 통영의 모습이 무대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표구사가 있던 자리에는 이제 붉은색 로스팅 머신이 오래된 서화들과 함께 있다. 정교하게 이어 붙인 작은 타일벽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그 작업의 결과물을 감상할 수 있는 무대에 닿을 수 있다. 전국에서 모여든 인디 예술가와 통영을 지키는 우직한 자영업자들은 이 무대에서 6년째 노래를 부르고 축제를 열고 있다. 그 사이로 통영에 대한 오랜 기억과, 남도의 카페들에서 마주한 잊지 못할 풍경들과, 오래도록 표구사를 지켜온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가족과 이웃 모두 이곳에서 오래도록 평화롭기를 바라는 마음이 기승전결을 이뤄 한 잔의 커피가 된다.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니 그 풍경은 통영의 새로운 힘으로 바뀐다. 통영은 그렇게 다시 번영을 꿈꾼다.
백석도 박경리도 사랑한 통영, 아버지의 표구사를 카페로 바꾼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