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손갤러리 개인전 엄정순 작가 "남의 땅에 사는 이들의 보편적인 이야기"
"600년전 한반도에 온 코끼리에서 찾은 디아스포라 이야기"
"코끼리는 디아스포라(이주·이산)의 상징 같은 것이죠. 어떻게 보면 남의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과 동물들에 관한 보편적인 이야기입니다.

세월과 관계없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를 동물의 서사와 비유를 통해 작업하는 것이죠."
서울 정동의 두손갤러리에서 개인전 '흔들리는 코끼리'전을 열고 있는 엄정순 작가는 10여년 전부터 코끼리를 소재로 작업하고 있다.

왜 하필 코끼리일까.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야생에서 만난 코끼리가 어느 순간 자신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영감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코끼리에 특별한 관심이 있어서 시작한 것은 아니에요.

좀 뜬금없지만 예술가들은 어떤 대상과 만날 때 영감 같은 것을 받을 때가 있는데 저한테도 그런 순간이 있었어요.

무언의 대화 속에 코끼리가 저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죠. 왜 코끼리가 나에게 이런 말을 걸까…. 그게 시작이었죠."
"600년전 한반도에 온 코끼리에서 찾은 디아스포라 이야기"
그에게 코끼리는 디아스포라의 상징 같은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600여년 전 처음 이 땅에 건너온 코끼리의 이야기가 모티브가 됐다.

한반도에 코끼리가 들어온 것은 조선 태종 때인 1411년 2월. 일본에서 선물로 받은 코끼리는 신기한 동물이었지만 코끼리에 치여 사람이 죽고 먹는 양도 너무 많았던 지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생활하게 됐고 결국 귀양까지 가는 신세가 됐다.

귀양을 보내며 세종은 이런 지시를 남겼다.

"물과 풀이 좋은 곳으로 보내어 병들고 굶어 죽지 않게 하여라."(세종실록 1421년 3월 14일) 비록 귀양을 보내지만 측은지심을 고민한 흔적이 남아 있다.

역사 속 짧은 기록이지만 작가는 이 이야기에서 낯설고 다른 존재에 대한 태도를 발견했다.

"코끼리는 한반도에 없던 동물이고 낯설고 달랐죠. 이런 동물의 디아스포라를 바라보며 우리 역사도 다시 보게 되고 이런 다른 존재를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를 생각해 보게 됐죠."
"600년전 한반도에 온 코끼리에서 찾은 디아스포라 이야기"
작가는 코끼리의 귀양 여정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경로를 따라가며 코끼리의 눈에 비쳤을 풍경들을 사진으로 찍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마치 흔들린 듯한 느낌의 10m 길이 풍경 사진들을 구불구불 배치해 마치 코끼리의 여행에 동행하는 느낌이 들도록 전시장을 구성했다.

작가는 일반적인 작업 외에도 시각장애인 예술교육 활동도 하고 있다.

'우리들의 눈'이라는 사단법인을 통해 시각장애인 어린이들에게 실제 코끼리를 만져보게 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코끼리 작품을 만드는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 등을 진행하고 있다.

"저는 항상 두 가지 작업을 병행하는 작가죠. 하나는 회화, 조형 같은 이런 전통적인 방식으로 재료를 쓰는 작업이라면 다른 하나는 사람들과 하는 '커뮤니티 아트'죠. '본다'라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서 출발해 뿌리는 하나지만 그걸 다루는 형식은 완전히 다른 두 가지죠."
"600년전 한반도에 온 코끼리에서 찾은 디아스포라 이야기"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해 광주비엔날레에서 '박서보 예술상'을 받은 '코 없는 코끼리'도 볼 수 있다.

시각장애 학생들이 청각과 촉각, 후각으로 느낀 코끼리를 표현한 조형물을 재해석하고 실제 코끼리 크기로 대형화한 3m 크기 설치 작품이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작가가 제시하는 사회적 포용이 작업의 방식과 작품에 독보적으로 담겨 있다"고 평가했다.

작가는 당시 수상에 대해 "용기를 얻는 기회가 됐다"며 "내 작업이 나만의 관점이 아니라 동시대적 관점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돼서 기뻤다"고 돌아봤다.

"당시 코끼리는 이방의 존재였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이나 소수자들도 다르지 않아요.

소수자들에 대해 우리가 대응하는 방식도 전혀 다르지 않고요.

제 작업은 전 인류의 이야기이고 그런 의미에서 계속 파고들 수 있는 당대(동시대)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 같아요.

"
3월 16일까지 계속되는 전시에서는 사진과 설치, 드로잉, 회화 등 60여점을 볼 수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