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작성된 '학교요람'에 옛 생활상 담겨
학교에 의사부터 이발소까지…해방 후 인천 창영초 모습은
"옛날 학교 양호실에는 전속 의사가 있었네요.

"
지난 7일 인천시 동구 인천 창영초등학교에서 만난 차건호(55) 교장은 보물 다루듯 빛바랜 서적을 하나둘 꺼냈다.

'학교 요람'이라고 적힌 책에는 해방 이후 창영초 전신인 창영공립국민학교의 모습이 수기로 빼곡하게 담겼다.

표지에는 '단기 4282년 2월 편찬'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단기 4282년은 서기 1949년을 뜻한다.

작성된 지 70년이 넘은 이 책에는 학교 평면도부터 연혁 개요, 운영 현황과 목표 등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평면도에는 요즘 학교에서 보기 힘든 이발부나 곡간·향토실이 등장했다.

옛 시절 화장실은 뒷간이었고 매점은 판매부였다.

학교에 의사부터 이발소까지…해방 후 인천 창영초 모습은
이발부는 위생 유지를 위해 교내 복지 차원에서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재학생은 싼 가격에 먼저 이발할 수 있는 특전이 있었다.

교사와 학부모는 물론 마을 주민까지 교내 이발부를 이용할 수 있어 아침저녁으로 손님이 몰렸다는 기록도 담겼다.

옛 시절 학교 의무실에는 모두 4명이 근무했는데 이 중에는 전속 의사와 간호사도 있었다.

의무실 설치 목적은 학생들이 외부에 있는 병원을 거치지 않고 무료로 의료 혜택을 누리게 하는 것이었다.

창영초는 1896년 1월 인천부 공립소학교로 존재한 사실을 최근 인천시교육청으로부터 인정받으며 117년 역사를 128년으로 늘리게 됐다.

개교 시기가 11년 더 앞당겨지면 인천 최초의 공립초로서 학교의 역사도 새롭게 쓰일 예정이다.

근대교육의 산실인 창영초는 오랜 전통을 이어온 학교답게 옛 발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창영초는 옛 학교 건물이 통째로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다양한 근대 문화유산을 품고 있다.

교문을 지나면 보이는 2층짜리 붉은 벽돌조 건물은 인천시 유형 문화재인 '창영초 구 교사'다.

차 교장은 건물 외벽 곳곳에 시멘트로 덮은 자국을 가리키며 한국전쟁에서 생긴 탄흔을 메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치형 벽체와 함께 창문마다 이중으로 설치된 '오르내리창'은 근대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줬다.

오르내리창은 2개의 창문을 위아래로 구성하고 끈과 도르래를 설치해 수직 방향으로 여닫을 수 있게 만든 창문이다.

현재 이 건물 1층은 동문회 사무실과 근로자 휴게실 등으로 사용 중이고 2층에는 각종 기록물과 유물이 보관되고 있다.



교정에는 창영초가 인천 3·1운동 발상지임을 알려주는 기념비도 우뚝 서 있었다.

인천의 3.1운동은 1919년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 전신) 학생들에 의해 시작됐다.

이 학교 학생들은 서울의 독립운동 만세 시위에 동맹휴업으로 호응했다.

같은 해 3월 8일 오후 9시께 3학년생 김명진과 박철준 등은 학교 건물 2층에 몰래 들어가 미리 준비한 절단용 가위로 전화선을 끊어 경찰서와 연결된 통신을 차단했다.

이는 교직원들이 이틀 전 시작된 학생들의 동맹휴업 사실을 경찰에 알리며 독립운동을 방해한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다른 한쪽에는 창영초 40회 졸업생인 강재구 소령의 흉상도 자리 잡고 있다.

그는 1965년 훈련병이 잘못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막아 많은 부하를 살리고 산화했다.

학교에 의사부터 이발소까지…해방 후 인천 창영초 모습은
이처럼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창영초이지만, 학령 인구 감소와 원도심 쇠락에 따라 존립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냉담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올해 창영초 입학생은 36명으로 2개 학급으로 겨우 꾸려질 예정이다.

앞으로 입학생이 25명 이하로 감소할 경우 1개 학급 체제로 들어선다.

지난해에는 창영초를 인근 금송 재개발구역으로 옮기고 해당 부지에 여자중학교를 신설하는 안이 추진됐다가 지역사회의 거센 반발 끝에 무산되기도 했다.

차 교장은 13일 "학교의 자구책만으론 학생 수 감소에 대응하기 어렵다"며 "100년 역사를 이어가려면 교육 당국과 지역사회의 꾸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