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의 위계가 사라져간다. 부모님이 주도하던 명절이 그 아래대로 내려오며 7080세대의 자유주의 물살을 탄다. 전통보다 변화, 정통보다 합리를 추구하며 혁신을 이룬다. 명절에 꼭 모이지 않아도 된다며 해외로 휴가를 간다. 명절 음식 직접 하는 노동은 그만하자며 깔끔하게 먹을 만큼만 주문한다. 가족끼리 벌이던 화투판, 윷놀이 사라지고 카페에서 담소하거나 각자 좋아하는 영상 보기면 족하다.

세월이 흐르며 명절의 풍경은 확연히 달라졌지만, 가족의 의미나 본질이 변한 건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정 혹은 개인의 가치가 극대화된 세계가 아닌가 한다. 모두 각자도생을 외치며 자기의 행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들. 과연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이번 설은 가장 게으르고 편한 명절이었다. 각자 한 집당 하나의 음식을 맡았고 미리 주문해서 예쁜 통에 담아갔다. 설날 아침 모여 세배를 하고 떡국과 음식을 나눠 먹고 차 한잔 마시고 헤어졌다. 예전처럼 음식 장만하느라 하루 함께 자며 전으로 산을 쌓고, 우리가 남이가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다 불콰해져서 시비 붙고, 그런 번거로운 과정들을 생략하자 본질만 남았다.

명절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깔끔한 평화가 찾아왔다. 왜 진작 이리 안했을까. 덩치가 커진 손주들의 웃음에 힘없는 부모님은 희미하게 미소지을 뿐. 시간과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딸과 함께 전시회를 찾았다. 마침 딸이 보고 싶어한 <폼페이 유물전_그대, 그곳에 있었다>전이 여의도 더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순식간에 사라진 도시' 폼페이에서 영원히 남겨진 가족들
폼페이는 그야말로 하루 아침에 사라진 도시다.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고대 로마의 도시. 로마의 번영으로 문명의 중심이었으나 베수비오산이 폭발하며 순식간에 도시 전체가 화산재에 뒤덮혀 역사 속에 파묻혔다. 잿더미 속에서 폼페이 유적이 발굴되며 그 시절의 역사가, 문화가, 개개인의 삶이 고스란히 살아났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의 실제 소장품이다. 우리가 유물을 보며 느끼는 것은 고고학적 의미와 가치가 아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모습과 생각을 떠올려보는 것. 오래고 아득한 삶을 더듬어 보는 것. 다만 이렇게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다.

피할 새도 없이 그대로 파묻힌 고대의 유적과 그 안의 사람들. 흔적은 예술이기 전에 삶이고 사랑이고 이야기다. 전시를 보는 내내 폼페이의 일상과 웃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떠올렸다. 신화의 신들은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 아름답고 시기하며 때로 거칠고 더러 냉정하다. 그들도 사랑하고 사랑에 취약하기도 하며, 다정하다가 제멋대로기도 하다. 아름답고 인간적인 조각상들을 들여다보던 딸이 말한다.
'순식간에 사라진 도시' 폼페이에서 영원히 남겨진 가족들
"신이나 사람이나, 고대 로마나 현재 한국이나, 사람 사는 것 비슷하네. 사랑 타령하는 것도. 사랑이 뭐길래! 하하하."

"앗, 이 사람들 화장도 하고 향수도 썼네!"

화장 도구들과 앙증맞은 빗, 병 등 고대 여자들의 미용 수준에 깜짝 놀란다. 그 시절 여자들은 아름다움에 관심이 많아 매일 공중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화장품을 바르고 좋은 향수를 썼다. 자칫 향락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삶의 향유를 끌어올리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 자연을 누리며 신을 추앙하고 몸을 깨끗이 하여 사랑을 즐기는 사람들였을 것이다. 일상은 평화롭게 흘러갔을 테고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지금 우리처럼.

모든 비극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처음 듣는 굉음에 공포에 사로잡힌 순간, 그 순간이 영원이 됐다. 베수비오산이 불과 재를 내뿜고 폼페이 최후의 날을 맞았다. 그 마지막 날,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폼페이는 언제나 축제가 이어지는 도시였다. 전날의 땅울림이라거나 베수비오산 위 구름의 이상한 모양 등 전조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가볍게 무시했다. 모든 신들이 축복해주는 땅, 모두가 부러워하는 풍요로운 도시, 우리는 영원을 살거라고! 인간의 착각 또한 오래고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다.
'순식간에 사라진 도시' 폼페이에서 영원히 남겨진 가족들
전시의 마지막에 쓰러진 사람의 조각과 미디어 아트를 보여준다. 뜨거운 화산재 속에서 그대로 화석이 된 사람의 조각 (캐스트),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우리에게 묻는다.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순간적이면서 동시에 영원한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미디어 아트로 구현된 베수비오 화산 폭발 장면은 솔직히 기술적으로 만족스럽진 않았다. 그런데 텍스트의 통찰과 몰입도가 몹시 좋았다. 잠깐이지만 폼페이 마지막 폭발의 순간으로 데려가는 경험이 많은 걸 떠올리게 한다. 뜨겁고 아득한 삶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떠올릴 것인가.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있을까' 일 것 같다.
'순식간에 사라진 도시' 폼페이에서 영원히 남겨진 가족들
폼페이 최후의 날, 사람들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과 있었다. 가족과 혹은 연인과 혹은 좋아하는 누군가와. 두려웠지만 순간도 잠시, 함께 영원 속으로 사라졌다. 가족이 해체되는 핵개인의 시대라지만 역시 우리는 누군가 필요하다. 좋아하는 영상 보며 혼자 웃다가도, 함께 보고 눈 마주치며 까르르 웃을 당신이 필요하다.

기나긴 명절 멀리 떠나는 여행도 좋지만, 식구들 북적이며 옛날 이야기 하고 또 하는 하루도 꽤 재밌는 것이고 말고. 오랜 역사의 흔적과 사유로부터 막 새해가 시작된 현재로 발을 딛는다. 딸이 팔짱을 꼭 껴오며, 우리 함께 있는 지금이 제일 행복해! 웃는다. 폼페이 전시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