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벌레야
이색

자벌레야 너는 왜 구부리느냐.
심하게 구부리면 네 뼈가 꺾어지고
자벌레야 너는 왜 펴느냐.
심하게 펴면 네 몸이 욕을 보느니
잠시 폈다 또 잠시 구부려
일생 동안 거스름이 없구나.
이런 까닭에 옛사람 학문은
먼저 사람에게 격물을 가르쳤는데
어찌하여 지금 사람들은
한결같이 요로만 추구하는가.
학문 강습은 쉬지 않는 게 귀하고
공을 펼침에는 법칙이 있다네.
더구나 조관(朝官)의 반열에서야
자용(自用)하면 남이 꼭 진노하리라.
이것으로 인해 밝은 덕을 얻으면
상제가 밝게 굽어 임할 것이니
기거 동작에 두 마음이 없어지면
끝내 자벌레 시를 지을 것도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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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벌레가 몸을 구부리는 까닭은 [고두현의 아침 시편]
고려 시대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지은 시입니다. 시인은 미세하기 짝이 없는 자벌레의 움직임을 자세하게 관찰하면서 그 속에 담긴 삶의 깊은 이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 잇속을 챙기려고 굽신거리는 세인들의 행태를 비판하고,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기도 하지요.

이 시에 나오는 ‘자용(自用)’은 제멋대로 하는 걸 의미합니다. 공자가 “어리석으면서도 자용(自用,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만 하는 것)하기를 좋아하고, 지위가 낮으면서도 자전(自專,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여 처리하는 것)하기를 좋아하고, 지금 세상에 나서 옛 도를 행하려 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재앙이 그 몸에 미칠 것”이라고 한 데서 온 말이지요.

자벌레는 길이를 재는 자처럼 생겼습니다. 한자로는 자 척(尺), 자벌레 확(蠖)을 써서 척확(尺蠖)이라고 하지요. 자나방과의 애벌레를 가리키는데, 나뭇가지나 큰 잎 위를 자로 재듯이 몸을 구부렸다 펴면서 이동합니다. 위장할 때는 주로 몸을 비스듬한 일자(一)로 쫙 피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명 ‘숨바꼭질의 달인’이라고 합니다.

영어(geometer)로는 지구(geo)를 계량기로 재는(meter) 것이라는 뜻이니, 이름만으로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벌레가 아닌가 싶습니다.

옛사람들은 “자벌레가 몸을 구부리는 까닭은 장차 곧게 펴려는 것”이라며 의미심장하게 말하곤 했습니다. 이는 <주역>에 나오는 말로, 앞날을 도모하기 위해 지금의 어려움을 참고 자기를 낮추는 자세를 뜻하지요.

다산 정약용은 “높은 자리는 과녁과 같아서 누구나 거기를 향해 활을 쏘고자 하니 항상 처신에 조심해야 한다”고 아들들에게 당부했습니다.

고려 시인 이색보다 600년 뒷사람인 백석(1912~1996) 시인의 시 ‘산비’에도 자벌레가 등장합니다.

산뽕잎에 빗방울이 친다
멧비둘기가 인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둘기 켠을 본다

백석은 자벌레를 ‘자벌기’라고 표기했죠? ‘벌기’는 ‘벌레’의 평안⸱함경도 방언이랍니다. 시인은 빗방울과 멧비둘기와 자벌레의 짧은 움직임을 한 폭의 소묘처럼 스케치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평화로운 숲속의 한 장면이고, 어찌 보면 긴장된 먹이 사슬의 한 단면인 것 같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세요? 자벌레가 숨을 멈추고 일자로 엎드려 나뭇가지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가 사냥꾼인 멧비둘기가 날아가 버리자 비로소 안도하며 고개를 살짝 들고 그쪽을 바라보는 것 같죠? 생사의 운명이 갈리는 순간이기도 한데, 시인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 장면을 남 일인 양 보여주기만 합니다.

내친김에 유재영(1948~) 시인의 현대 시조 ‘자벌레 론(論)’을 함께 감상해 보시죠. 세월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 인생의 보폭을 재는 자벌레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생을
접다 폈다
끌고 온
지평선

한 대목
이르러서
고개를
반짝 든다

산목련
이우는
골짝


은발(銀髮)의
물소리,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