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느티나무들
신경림

산비알에 돌밭에 저절로 나서
저희들끼리 자라면서
재재발거리고 떠들어쌓고
밀고 당기고 간지럼질도 시키고
시새우고 토라지고 다투고
시든 잎 생기면 서로 떼어 주고
아픈 곳은 만져도 주고
끌어안기도 하고 기대기도 하고
이렇게 저희들끼리 자라서는
늙으면 동무나무 썩은 가질랑
슬쩍 잘라 주기도 하고
세월에 곪고 터진 상처는
긴 혀로 핥아 주기도 하다가
열매보다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머리와 어깨와 다리에
가지와 줄기에
주렁주렁 달았다가는
별 많은 밤을 골라 그것들을
하나하나 떼어 온 고을에 뿌리는
우리 동네 늙은 느티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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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끝까지 말하지 않은 비밀 [고두현의 아침 시편]
느티나무에겐 비밀이 많습니다. 겨울눈을 감추고 봄을 기다리는 모습부터 뭔가 내밀한 사연을 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추위가 꺾이고 바람결이 부드러워지면 연한 햇가지를 슬며시 내밀지요. 봄이 제대로 왔는지 조심스레 살피는 햇가지들의 움직임은 느리고 은밀합니다.

꽃을 피울 때도 그렇습니다. 4~5월이 되면 가지의 잎겨드랑이에서 연녹색 꽃을 살살 밀어내지요. 놀랍게도 수꽃과 암꽃을 한 몸에 피웁니다. 수꽃은 햇가지 아래쪽에 여러 송이로 돋는데, 자세히 보면 수술이 4~6개 있습니다. 암꽃은 햇가지 끝에 한 송이만 피지요. 암술 한 개에 퇴화된 헛수술을 거느리기도 합니다.

느티나무 꽃은 여느 나무와 달리 녹색입니다. 꽃잎이 없어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드물지요. 벌과 나비를 유인하는 향기도 없습니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에 꽃을 감추는 나무도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이 볼품없는 꽃은 느티나무가 얼마나 속 깊은 마음을 지녔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화려한 꽃을 자랑하는 여느 나무와 다르지요.

겉보기에는 부드러워도 속은 단단합니다. 어디서나 잘 자라고 성장 속도가 빠르죠. 수명도 길어서 500년 넘은 노거수가 많습니다. 다 자랐을 때의 높이는 20~35m, 지름이 3m에 이른답니다. 가지를 사방으로 고르게 뻗고 잎이 무성해서 정자나무로 사랑받지요. 시골 마을 입구를 지키는 거목의 대부분은 느티나무입니다. 몇백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왔기에 보고 들은 사연도 갖가지겠죠?

경남 의령 세간리에 있는 큰 느티나무는 ‘현고수(懸鼓樹)’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 나무에 북을 달고 치면서 의병을 모집했다고 하죠.

대구 동구 파계사에는 영조 임금의 탄생설화를 간직한 ‘영조 나무’가 있고, 수성구 고산서당에는 퇴계 이황 이야기를 지닌 ‘이황 나무’가 있습니다.

충북 영동의 350년 된 느티나무는 ‘독립군 나무’로 불립니다. 일제강점기 때 마을 사람들이 나무에 헝겊을 걸어 일본 순사들의 감시 상태를 알린 덕에 독립운동가들이 무사할 수 있었다는군요. 3·1운동 때 서울에서 영·호남지방으로 독립선언문을 전달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느티나무가 많은 곳은 충북 괴산입니다. 괴산의 ‘괴(槐)’는 느티나무를 뜻하는 한자죠. 괴산군 장연면 우령마을에는 800년 된 천연기념물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느티나무는 농부들에게 한 해 농사가 어떨지 암시해주기도 하지요. 잎을 한꺼번에 많이 피우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줍니다.

이렇게 수많은 이야기를 안고 있는 느티나무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아늑한 휴식을 제공합니다. 쉴 휴(休)자는 사람(人)이 나무(木) 그늘 아래에 있는 것을 의미하지요. 여름날 시원한 바람 속에 누워 있다 보면 달콤한 잠에 빠지기도 합니다. 꿈속에서 기뻐하고 슬퍼하는 동안 입술을 실룩이기도 하고 이마를 찡그리기도 하지요. 느티나무는 그 표정만 보고도 무슨 꿈을 꾸는지 압니다.

느티나무는 품이 넓고 잎이 무성한 데다 귀까지 밝습니다. 그러나 입은 무겁습니다. 비밀을 끝까지 지킵니다. 연인들이 나눈 밀어도 제 몸에 새길 뿐 발설하지 않지요. 그래서 느티나무 껍질에는 청춘의 밀어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습니다. 몸속 무늬에도 은밀한 사연들이 나이테처럼 새겨져 있지요. 때로는 안타까운 사랑의 현장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강신재 소설 ‘젊은 느티나무’에서는 풋풋한 젊음과 사랑의 증인이 됩니다. 이 작품에서 느티나무는 부모의 재혼으로 오누이가 된 22세 청년과 18세 여고생의 비밀을 공유하지요.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처럼 순수하고 설레는 둘의 사랑과 위기는 ‘젊은 느티나무’ 덕분에 눈물과 환희로 승화됩니다.

느티나무 사이의 옅은 들장미 향기와 원피스 자락 위에 놓인 흰 꽃잎, 급한 비탈을 막 올라오는 청년……. 그 앞에서 느티나무를 안고 소녀는 눈물을 그득 담은 채 환하게 웃지요. 펑펑 울면서 온 하늘로 퍼져 가는 웃음을 말입니다.

느티나무는 저의 어릴 적 비밀도 알고 있습니다. 막걸리 심부름하다 몰래 주전자 주둥이 빨아먹고 시침 떼던 옛일을 짐짓 모르는 체해줍니다. 책값 받아 사탕 과자 사 먹고 혼날까 봐 신발코만 콩콩 찧던 그날 저녁의 비밀도 일러바치지 않습니다.

그런 느티나무가 고마워서 저는 곁을 지날 때마다 든든한 둥치를 안아보곤 합니다. 지난겨울 혹한 속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올봄에는 누구를 생각하며 암수 꽃을 한꺼번에 피워 올리는지 궁금해도 물어보지 않습니다. 속 깊은 친구끼리는 미주알고주알, 밑두리콧두리 말하지 않고 눈빛만 봐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으니까요.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