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감옥살이 뒤 목숨 끊은 아버지…30여년 뒤 아들도 간첩 몰아 고문
진실화해위, 피해자 인정…2대째 간첩조작 피해 처음 드러나
대 이어 '간첩' 누명 씌운 국가…"우리 父子에게 사과 바랄뿐"
"하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했고 겁나는 일도 많았던 삶이었어요.

간첩으로 몰려서 정말 죽는 줄 알기도 했고요.

돌아가신 아버지를 뵈면 꼭 끌어안고 할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
1956년 '인천 덕적도 어민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고(故) 김선규 씨의 아들 김윤보(85)씨는 지난 12일 연합뉴스와 통화하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지난 9일 "내무부 치안국(현 경찰청)이 적법한 영장 없이 불법으로 가두고 고문과 가혹행위를 가했음을 확인했다"며 고인을 피해자로 인정했다.

아들 김씨 또한 1989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다.

대를 이은 간첩 조작 피해 사실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1980년 '진도 가족간첩단 사건' 등 하나의 간첩 조작 사건에 가족이 연루된 사례는 여러 건 있었지만, 김씨 부자(父子)처럼 대를 이어 간첩으로 조작된 사례는 이번에 처음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김씨 가족은 전 재산을 북한 정권에 몰수당하고 1951년 1·4후퇴 때 황해도 장연군에서 인천 덕적도로 내려왔다.

김씨의 아버지는 어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김씨가 열일곱 살이던 1956년 10월 내무부 치안국은 그의 부모가 '피난민으로 위장한 간첩 부부'라며 함께 연행했다.

아버지가 새우젓을 팔기 위해 발품을 판 것이 북한 정찰국으로부터 지령을 받은 공작원 연락·수송 업무로 둔갑했다.

그해 8월 '강화도에 볼일이 있으니 함께 가자'는 처남에게 속아 닷새간 북한 옹진반도를 다녀간 것이 화근이 됐다.

어머니는 불기소 처분을 받고 6개월여 뒤 풀려났으나 아버지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우리 아버지는 문맹이셨어요.

당시 피의자신문조서와 1심 판결 당일 작성됐다는 항소포기서를 보니 아버지 자필 서명이 '김선규'가 아닌 '김성규'로 돼 있더군요.

이런 엉터리가 어디 있습니까.

"
김씨는 "뱃사람으로 일하면서 몸이 튼튼하셨던 분이 고문으로 어깨와 허리가 망가져 제대로 걷지도 못하셨다"며 "갑자기 겁에 질려서 '누가 쫓아오니까 함께 다니면 안 된다'고 말씀하곤 하셨다"고 전했다.

만기 출소한 지 2년여 만인 1968년께 아버지는 야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 이어 '간첩' 누명 씌운 국가…"우리 父子에게 사과 바랄뿐"
'빨갱이의 아들'이라는 주홍 글씨는 김씨의 삶을 짓눌렀다.

온종일 굶은 세 동생의 몸이 퉁퉁 부었지만 이웃들은 밥 한 숟가락 나눠주지 않았다.

김씨는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꿈꿨지만 연좌제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39년생 김윤보'에서 '1931년생 김철'로 호적을 바꾸기도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견디다 못한 김씨는 1984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 무역회사를 운영했다.

사업이 잘되면서 새 출발을 꿈꿨으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89년 4월 김씨는 수출 상담을 위해 한국에 왔다가 느닷없이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한 친구가 사업 문제로 사이가 틀어지자 김씨의 재산과 포상금을 노리고 '김씨가 조총련 간부에게 공작금과 함께 간첩 지령을 받았다'고 경찰에 거짓 신고한 것이었다.

경찰은 김씨를 슬리퍼로 마구 때리는가 하면 철봉에 거꾸로 매달고 구타하는 '통닭구이' 고문과 물고문을 가했다.

대공분실에 구금된 24일 동안 김씨는 총 15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한 수사관은 "네 아버지도 간첩 아니었느냐"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남영동에서 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이렇게 당하셨으니 그렇게 폐인이 되셨구나' 싶었어요.

북한 정권은 전 재산을 뺏더니 남한 정권은 간첩으로 몰아 한 부자를 망가뜨린 거예요.

"
1심에서 사형을 구형받기도 한 김씨는 1991년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이 확정됐고 1995년 가석방됐다.

김씨는 사건 23년 뒤인 2012년 7월 재심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활동을 하며 아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던 어머니는 김씨가 누명을 벗는 걸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김씨는 지난해 5월 아버지의 사건에 대해서도 재심을 신청했다.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되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호적상 자신의 이름과 생년월일도 원래대로 되돌릴 계획이다.

인천 영종도 집에 혼자 사는 김씨는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김씨는 "뼈마디가 저리고 아파서 100m만 걸어도 앉았다 한참을 쉬어야 하니 거동하기 어렵다"며 "아직도 누군가에게 쫓겨 다니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고 말했다.

사건 이후 두 딸과는 왕래가 끊긴 지 오래다.

"한동안 이 나라가 역겨웠어요.

날강도 같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어찌 됐든 제 조국이고 앞으로도 제 자손들이 살아가야 할 땅 아니겠습니까.

그저 하루빨리 국가가 잘못을 인정하고 우리 부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기만 바랄 뿐입니다.

"
대 이어 '간첩' 누명 씌운 국가…"우리 父子에게 사과 바랄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