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의 종횡무진 경제사] 16세기 中·日에 전해진 유럽의 시계…어떻게 두 나라 운명 갈랐나
시간은 내 편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가진 것 하나 없지만 뭐가 되도 될 거라 믿었던 20대 초반이다. 판단이 명료해지는 불혹에 이르자 믿음이 흔들렸다. 시간은 내 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계시 같은 깨달음이다. 그때부터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이제는 확신한다. 시간은 절대 내 편이 아니다. 시간은 시간의 편이고 내 편이라고는 집에서 같이 나이 들어가는 여자뿐이다. 산소 같았던 여자는 이제 산 소(牛) 같은 여자가 됐고 풀 대신 나를 뜯는다.

시간은 인간에게 영감을 준다. 큰아이는 소해, 소월, 소시에 났다. 해서 아명을 남소삼이라 했는데 1950~1960년대 남파 여간첩 이름 같다고 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용의 해인 올해는 용띠들에게 근거 없는 희망을 준다. 때가 되면 왔다 가는 시간의 뭉텅이일 뿐인데도 왠지 반갑고 다정하게 느껴진다. 반대로 중국에서는 태어난 해가 돌아오면 각별히 조심하며 1년을 보낸다. 인간은 시간을 구분한다. 똑같은 시간인데도 2023년 12월 끝 날의 12시와 2024년 첫날의 1시는 다르게 느낀다. 마치 100m 달리기의 출발선에 새로 서는 느낌이지만 작심삼일이라는 복병이 기다리고 있다. 72시간 만에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시간은 위대한 교사다.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 흐른다. 이유를 설명한 것 중 철학적, 현상학적, 심리학적 설명은 하나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나마 설득력 있는 게 모래시계 이론이다. 매일 한 번씩 뒤집는다는 전제하에 시간이 지나면서 병목 구간의 유리가 닳아갈수록 모래의 낙하 속도가 빨라진다는 얘기다. 뭐, 위로는 안 된다. 시계를 기계 안에 가둔 게 시계로 해시계, 물시계, 불시계(양초)에 이어 나타난 모래시계도 시계의 엄연한 족보에 들어간다.

시계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동북 군벌 장쉐량(張學良)이다. 그는 장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1898년 출생해 20세기를 통과한 후 간당간당 턱걸이로 2001년에 사망했으니 명목상 3세기를 살았다.
< 장쉐량이 시계를 보낸 이유 > 장제스 초대 대만 총통(왼쪽)과 그의 부인 쑹메이링의 1964년 사진. 장제스는 시안 사변 때 자신을 감금한 데 대한 ‘보복’으로 동북 군벌 장쉐량을 연금했고, 장쉐량이 악연을 끝내자는 의미로 시계를 보냈지만 묵살했다. /한경DB
< 장쉐량이 시계를 보낸 이유 > 장제스 초대 대만 총통(왼쪽)과 그의 부인 쑹메이링의 1964년 사진. 장제스는 시안 사변 때 자신을 감금한 데 대한 ‘보복’으로 동북 군벌 장쉐량을 연금했고, 장쉐량이 악연을 끝내자는 의미로 시계를 보냈지만 묵살했다. /한경DB
그러나 삶의 양만큼 중요한 게 삶의 질이다. 1949년 대만으로 도망가면서 장제스는 두 가지를 챙겨갔다. 명·청조 시대의 유물들과 장쉐량이다. 시안 사변으로 장쉐량에게 감금당했던 치욕을 뒤끝 왕인 그는 잊지 않았다. 1937년 1월 1일부터 시작된 장쉐량의 연금 생활은 1992년 1월, 50년을 훌쩍 넘겨 끝났다. 장제스는 1973년에 사망했지만, 아들인 장징궈가 부친의 유지를 받들었기 때문이다. 생의 절반 이상을 연금 상태로 지낸 지겨운 인생이었다. 연금 도중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시계 선물을 보낸 적이 있다. 장제스는 낚싯대를 보내는 것으로 답했다. 이제 시간도 지날 만큼 지났으니 나를 놔달라는 신호에 아직 멀었으니 다 잊고 낚시나 하라는 대꾸를 한 것이다.

시계에 대한 해석은 하나 더 있다. 시계의 중국 발음이 쫑이다. 끝나다(終)와 발음이 같아 시계를 선물하는 건 관계를 끝내자는 말과 같다. 장쉐량은 이제 지겨운 악연을 끝내자는 얘기였고 장제스는 악연은 끝나지 않아 악연이라고 답한 셈이다. 중국에서 시계 선물은 금물이고 반면 우리는 결혼 패물로 시계를 주고받는다. 이성(異性)으로서의 시간은 끝난다는 의미로 해석해 본다.

시계를 가리키는 중국어가 종(鐘)이다. 유럽에서도 시계의 시초가 종이었으니 기원이 같다. 유럽의 기계 시계는 13세기 말 본격적으로 제작에 발동을 걸었는데 이 시기에 최초의 대포가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두 가지 모두 금속 직공 계층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초창기 시계 제작자의 대부분은 대포 주조공이기도 했으며 아르바이트로 자물쇠를 만들기도 했다.

시계와 대포 두 기계의 동시 출현은 유럽 스타일 근대화의 특징인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사태의 예고편이었다. 서양인들이 본격적으로 아시아에 진출한 16세기, 유럽 상인들의 고민은 동양의 무역 산물과 교환할 상품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 그 ‘거의’라는 수사를 붙일 수 있도록 해 준 게 기계식 시계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서양 시계와 천문학 그리고 금속 세공의 연관성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이들에게 기계식 시계는 오로지 장난감이었으며 주요 용도는 뇌물이었다. 하긴 유럽인들이 렌즈를 가지고 현미경을 지나 망원경과 안경으로 진화시키는 동안 중국인들에게는 렌즈 역시 내내 장난감 신세였으니 특별히 놀랄 일은 아니다.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기에 변두리에는 별 흥미를 못 느끼는 유난한 민족성도 있지만 달(月)로 시간을 헤아리는 농민 주축 사회에서 겨우 하루를 재는 시계가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

일본에 유럽 기계 시계가 처음 들어간 것은 1550년으로 한 서양인 신부가 야마구치의 다이묘에게 선물로 증정했다. 그러나 중국과 다르게 일본인들은 이 기계를 뜯어보고 자체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일본 시계 제작자들의 본업은 솜씨 좋은 대장장이였다. 유럽과 같은 계통의 발전사다. 이 차이가 19세기 말~ 20세기 초 중국과 일본 두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고 말하면 너무 나간 것일까. 확실한 건 당시 1억5000만 명 인구의 중국이 2500만 명의 일본에 맞아 골병이 드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