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난해한 시는 가라"…짧은 4행시 '바람' [고두현의 문화살롱]
돌담 - 최동호

제주 남풍 파도 타고

아무리 불어도

노래하던 처녀애들 치마끈 풀어야

돌담에 봄바람 난다


기쁨, 슬픔 - 나기철

이 섬 안에
네가 있는 거

이따금 멀리서
볼 수 있는 거


금동반가사유상 - 서정춘

저 다리하며 그 무릎 위에
턱 괴고 앉았기로
천년 시름이겠구나
진즉에 그 자리가 내 자리였느니,


막간 - 문태준

아침 이슬이 다 마르도록 울더니
밤이슬이 내릴 때 또 우네
아침 귀뚜라미에게 물었더니
밤 귀뚜라미가 울며 말하네


‘저 다리하며 그 무릎 위에/ 턱 괴고 앉았기로/ 천년 시름이겠구나/ 진즉에 그 자리가 내 자리였느니,’ 서정춘 시인의 4행시 ‘금동반가사유상’이다. ‘죽편’ 등 짧고 강렬한 시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그는 단시(短詩)의 대가로 불린다. 요즘은 4행시에 매료돼 있다.

최근 출간된 계간 <서정시학> 100호는 서정춘 시인을 비롯한 26명의 4행시를 특집으로 꾸몄다. 참여 시인들의 연령대는 80대 원로부터 40대까지 다양하다. 문장은 짧지만 빼어난 서정과 서사를 겸비한 작품이 많다. 길고 난해한 ‘해체시’, 수다스러운 ‘장거리 시’에 잠식당한 국내 시단에 ‘4행시 운동’이 새바람을 일으키는 모양새다.

1400년이 넘는 4행시의 역사

나기철 시인의 ‘기쁨, 슬픔’이라는 시는 ‘이 섬 안에/ 네가 있는 거// 이따금 멀리서/ 불 수 있는 거’라는 20자짜리다. 그 속에 사랑과 아픔의 이중적 정서를 고요히 담아냈다. 문태준 시인은 ‘막간’이라는 시에서 ‘아침 이슬이 다 마르도록 울더니/ 밤이슬이 내릴 때 또 우네/ 아침 귀뚜라미에게 물었더니/ 밤 귀뚜라미가 울며 말하네’라고 노래했다. 아침저녁의 대비가 정갈하면서도 웅숭깊다.

한경옥 시인은 ‘까치’라는 시에서 ‘첫눈 내린 아침/ 설원에 첫 발자국 찍는다고/ 설레지 마라. 이미/ 바람과 입 맞추고 햇살과 몸 섞었다’고 읊었다. 이현승 시인의 ‘바람 부는 저녁’은 상대적으로 긴 편이지만 4행시의 율격을 잘 살린 시다. ‘산책로에서 갈대의 간격을 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촘촘하게 서걱이는 갈대들/ 눈물을 훔쳐 주기 좋은, 부대끼기 좋은,/ 흐느끼는 사람의 곁에서 가만히 외면하기 좋은 간격이 있다.’

이 잡지에 실린 4행시 특집 대담도 주목된다. 대담에는 오래전부터 4행시에 관심을 갖고 이번 특집을 기획한 최동호 시인을 비롯해 이하석·신동옥 시인, 유성호 문학평론가가 참여했다. 이들은 4행시의 연원을 신라 향가에서 찾았다. ‘풍요’ ‘헌화가’ ‘혜성가’ ‘구지가’ 등이 구조적 완결성을 지닌 4행시의 원조라는 것이다. 역사가 1400여 년에 이른다.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김영랑과 김달진 시인 등이 장르적 의식을 갖고 4행시를 많이 썼다. 김영랑은 <영랑시집>에서 제목 없는 4행시들을 발표한 뒤 <영랑시선>에선 제목을 붙이고 배열을 조정하는 형식으로 이를 확장했다. 그는 음악성을 매우 중시했다.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박목월의 ‘윤사월’, 박용래의 ‘저녁 눈’도 대표적인 4행시다.

김달진 시인은 만년에 <소곡회한집>이라는 제하의 연작시 60여 편을 4행시로 선보였다. 소동파의 ‘적벽부’에 나오는 ‘망미인혜천일방(望美人兮天一方)’이란 인용구로부터 시작하는 이 작품은 멀리 있는 연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4행시는 ‘소곡’이라는 단어처럼 노래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등단 시기는 김달진이 김영랑보다 앞선다. 근래에는 박희진 시인이 작고하기 직전에 시집 <4행시와 17자시>를 냈고, 윤수천 시인은 4행시집을 두 권이나 출간해 주목받았다.

'뒤집어지는 것'과 '번뜩임' 겸비

최동호 시인은 4행시의 구조적 측면에 관해 “기승전결을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을 구비한 형식이 4행시에 있다”며 “기승전결 구조의 묘미는 시가 완결돼 가는 과정에서 한 번은 ‘뒤집어져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4행시에는 노래의 음악적 자질도 있고, 시가의 구조적인 자질도 있는데 이는 내가 지금까지 제안해온 극서정시의 특징과도 상통한다”고 강조했다.

이하석 시인은 4행시의 호흡에 주목해 “우리에게 익숙한 호흡과 맞는 언어 형식으로 이뤄진 그 체계가 문화적인 유전자 속에 각인돼 있다”고 말했다. 또 짧은 시가 보여주는 ‘번뜩임’을 언급하면서 “시는 길든 짧든 어떤 섬광을 보여주며, 시적 섬광을 통해 어떤 세계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언어의 섬광이나 사유의 섬광, 이미지의 섬광일 수 있다”며 “이를 아울러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집약적인 구조가 4행시”라고 설명했다.

‘뒤집어지는 것’과 ‘번뜩임’의 묘미를 보여주는 시 가운데 이번 4행시 특집에 실린 최동호 시인의 ‘돌담’과 이하석 시인이 대담 중 소개한 ‘물잠자리’ 등이 눈길을 끈다. 최동호 시인의 ‘돌담’은 ‘제주 남풍 파도 타고// 아무리 불어도// 노래하던 처녀애들 치마끈 풀어야// 돌담에 봄바람 난다’의 36자로 이뤄져 있다.

이하석 시인의 ‘물잠자리’는 ‘물잠자리가 어느 풀에 어느 나무에 어느 돌에/ 어느 물이랑 깊은 곳에 잘 앉는지/ 소풍 가서 혼자 밥 먹으며 유심히 봅니다/ 당신은 또, 무심히 날 잊었지요?’의 59자로 구성돼 있다.

둘 다 기막힌 반전의 구절을 갖고 있다. 전복의 미학과 번뜩임의 섬광 사이에 통찰과 서정의 뿌리를 그대로 응축하고 있다. 이처럼 서정적인 4행시는 짧아도 그 속에 견고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런 시가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생명력을 갖는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일이다. 페르시아 문학의 <루바이야트>와 한시의 절구(絶句)가 모두 4행시다.

요즘 유행하는 ‘디카시’에도 4행시가 많다. 대중적인 호응과 창작 열기 또한 대단하다. 개중에는 시적인 깊이나 통찰의 희열보다 사진이라는 시각적 이미지에 기댄 경우가 많다는 지적도 있다. 결국 형태적 특성만큼이나 문학적 심도를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이번 대담과 신작 특집에 참여한 시인들도 “앞으로 구조적인 견고성에 대한 고민을 더 깊이 하고 이를 4행시의 미학으로 완성해내려는 노력을 지속해서 펼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