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을 에는 추위만큼 벤처투자 시장에도 혹한기가 이어진 한 해였다. 지난해보다 신규 벤처투자액이 더 줄었다. 하지만 2년째 이어진 ‘투자 겨울’에도 ‘기술’로 무장한 K스타트업은 성장세를 이어갔다. 특히 오픈AI의 챗GPT가 등장한 이후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주요 키워드로 떠올랐고, 이 테마를 가진 스타트업은 추위가 무색할 정도로 대규모 자금 조달에 성공했다. AI를 필두로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나 헬스케어 분야가 내년 주목해야 할 투자처로 꼽혔다.

벤처캐피털(VC) 업계는 올해 투자 시장이 저점을 찍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한파는 당분간 이어지겠지만, 금리가 안정되는 등 거시 환경이 나아지면서 내년부터는 벤처투자가 조금씩 회복세를 보일 것이라는 진단이다. 각 VC들은 올해보다 더 적극적으로 지갑을 열 준비를 마쳤다.
챗GPT發 AI 스타트업 격돌 본격화…내년 벤처투자 봄 올까 [긱스]

투자 25% 감소했지만

25일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올해 3분기까지 신규 벤처투자액(창투사+신기사)은 7조6874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5% 줄어들었다. 건당 투자액도 15.2억원에 그쳐 지난해(17.4억원)와 2021년(19.1억원)보다 낮아졌다. 투자를 받은 회사의 수도 지난해(3169곳)와 2021년(3323곳)에 비해 줄어든 2970곳으로 집계됐다. 펀드레이징에 어려움을 겪은 VC들이 늘어나면서 펀드 결성 규모도 지난해엔 12조7236억원이었지만 올해는 8조4482억원으로 34%가량 쪼그라들었다.

다만 희망도 보였다. 투자액을 분기별로 놓고 보면 2분기 2조7091억원, 3분기 3조1961억원으로 각각 전 분기 대비 52%, 18% 증가했다. ‘반짝’ 훈풍일지 지켜봐야겠지만 바닥을 찍고 올라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생성형 AI 돌풍…‘테크’ 승승장구

올해는 생성형 AI가 단숨에 주류로 떠올랐다. 지난해 12월1일 챗GPT가 세상에 공개된 이후 곧바로 세상이 요동쳤다. 오픈AI의 기업가치는 860억달러(약 112조원)까지 치솟았다. 프랑스 생성형 AI 스타트업 미스트랄AI는 최근 몸값을 20억달러(약 2조6000억원)로 평가받았는데, 불과 6개월 만에 7배 불어난 수치다.

국내에서도 올해 생성형 AI 스타트업을 향한 투자가 잇따랐다. 지난 6월 150억원을 조달한 뤼튼테크놀로지스가 대표적이다. AI 포털 서비스 ‘뤼튼’은 지난 3월만 해도 월간 활성 이용자 수(MAU)가 4만명에 불과했지만 이달 140만명으로 급증했다. 그런가 하면 ‘영상판 챗GPT’를 만드는 트웰브랩스는 지난 10월 미국 엔비디아로 등으로부터 130억원의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다. 엔비디아가 처음으로 한국 스타트업에 투자한 사례였다. 또 웹툰 생성형 AI 회사 라이언로켓도 이달 60억원의 자금을 조달했다.

내년에도 역시 AI를 필두로 한 ‘테크’ 스타트업들이 주목받을 전망이다. VC들은 AI 외에도 기업용 서비스형 소프트웨어(B2B SaaS), 헬스케어, 로봇,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등을 투자 유망 분야로 꼽았다. 박기호 LB인베스트먼트 대표는 “AI라는 메가 트렌드가 2020년대 산업계를 주도하고 있다”며 “잘 준비된 테크 회사들이 성장하는 해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부도 테크 스타트업을 지원사격한다. 내년부터 유망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의 상장 문턱이 완화되는 초격차 기술특례 상장(딥테크 특례 상장) 제도가 도입된다. 딥테크 스타트업이 상장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기술평가를 복수에서 단수로 정비했다. VC협회장을 맡고 있는 윤건수 DSC인베스트먼트 대표는 “투자 혹한기 협회장에 취임한 이후 가장 큰 성과가 딥테크 특례상장 도입을 이뤄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플랫폼 스타트업 다시 날까

투자 시장 침체와 규제·갈등 등으로 고초를 겪었던 플랫폼 스타트업이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올해는 전문직 단체와 갈등이 있던 플랫폼들이 일단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로톡’을 운영하는 리걸테크 회사 로앤컴퍼니가 대표적인 사례다. 대한변호사협회가 로톡에 등록된 변호사 123명에 징계 처분을 내렸으나 법무부가 지난 9월 이를 취소했다. 이에 따라 변협과의 8년째 이어진 분쟁이 일단락됐다.

세금 환급·신고 플랫폼 ‘삼쩜삼’ 운영사 자비스앤빌런즈도 한국세무사회 등과의 갈등으로 사업 동력을 잃을 위기에 처했지만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세무사법을 위반했다며 지난해 3월 고발당했지만 지난 11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비대면진료 분야에는 규제 장벽에 가로막힌 플랫폼들이 여럿 있다. 닥터나우·나만의닥터·올라케어 등이다. 비대면진료 시범사업 보완방안이 시행되면서 지난 15일부터 야간과 휴일 초진 비대면 진료가 허용돼 플랫폼 이용자 수가 급증했다.

다만 여전히 우려도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비대면진료 규제는 일부 완화됐지만 약 배송 제한은 유지되는 등 제약이 남아 아직 갈 길이 멀다는 평가다.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약사회 등 의료계의 반발도 발목을 잡고 있다. 내년 공정거래위원회가 추진 중인 ‘플랫폼 경쟁촉진법(온플법)’ 도입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면 스타트업 생태계가 더 위축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덩치가 커진 플랫폼 사업자들을 규제하겠다는 게 골자다. VC들은 이를 두고 한국에서는 더 이상 제 2의 네이버, 쿠팡이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김종우 기자 jo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