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거 중장년 쉼터서 겨울맞이 '어묵데이' 열고 무료 나눔
청년 고시생들 떠난 자리에 남아…"겨울에 더 외로워요"
한파 속 고시촌 모여든 중년들…온기 전한 '어묵 한 그릇'
"어묵 먹기 너무 좋은 날씨다.

" "이거 먹으려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어." "그 형님은 오늘 왜 안 왔대?"
얼핏 들으면 가까운 친구 혹은 가족 간의 대화 같지만, 이들은 모두 각자 1인 가구를 이루고 사는 중·장년 남성들이다.

지난 19일 서울 관악구 대학동 '고시촌'이라고 불리는 일대의 골목에는 함박눈까지 내리자 오가는 인파가 거의 없었지만, 23평 남짓한 '참 소중한…' 쉼터에는 40여명이 모여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곳을 운영하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대학동 고시촌 담당 이영우 신부가 어묵과 국물을 무료로 나눠주고 함께 먹는 '어묵데이'를 개최했기 때문이다.

이 신부는 행사 시작 20분 전부터 커다란 냄비 솥 2개에 어묵과 국물을 가득 담아 펄펄 끓이기 시작했다.

쉼터 공용공간이 어묵 열기로 데워질 때 즈음 두꺼운 겨울 점퍼를 입은 중·장년 남성들을 비롯한 인근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환한 웃음을 띤 채 "잘 지냈어? 요즘 왜 이렇게 안 보여", "그 형님은 어디 갔어", "못 본 새 예뻐졌다"며 근황과 안부를 묻는 대화를 이어갔다.

한파 속 고시촌 모여든 중년들…온기 전한 '어묵 한 그릇'
어묵을 나눠주는 이 신부도 주민들에게 "그 친구는 왜 안 왔느냐. 공부하느라 못 온 거냐. 그래, 열심히 해야지"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는 '오가는 주민들을 다 아느냐'는 기자 질문에 "독거 중년 100명 정도는 아는 것 같다"며 웃었다.

2017년 사법고시가 폐지되면서 20∼30대 청년들이 떠나간 고시촌에는 가정이 해체됐거나 원래부터 혼자인 중·장년 남성들이 모여들었다.

이들 대부분은 고시촌 언덕 꼭대기에서 보증금 없는 월세 15∼20만원짜리 단칸방에 혼자 사는데, 겨울이 되면 외로움이 뼛속까지 사무친다고 입을 모았다.

한파 속 고시촌 모여든 중년들…온기 전한 '어묵 한 그릇'
90년대 이전부터 고시 공부를 하다가 수차례 고배를 마시고 대학동에 정착해 20년 넘게 살았다는 김영진(58·가명) 씨는 "겨울이 되면 가장 힘든 건 추위보다도 외로움"이라며 "이 쉼터가 없었으면 고독사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텐데, 이곳이 생기고 나서는 서로 다 아는 사이가 되고 챙겨주니까 그럴 일이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솔로'라서 외롭지 않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6년 전부터 고시촌에 홀로 정착한 주모(52)씨는 '여기에 오면 무엇이 좋냐'는 기자 물음에 "다 좋아요.

먹을 것도 많고, 사람도 많고, 혼자 있으면 쓸쓸한데 여긴 다 친해서 좋아요"라고 답하며 웃었다.

인구 분포상 중년 남성이 절대다수였지만, 이날 쉼터를 찾은 주민 중에서는 40∼60대 여성도 5명가량 눈에 띄었다.

신림역에서 혼자 살고 있다는 40대 여성 이혜원씨는 "원룸에 취사 시설이 없어서 라면 끓여 먹기도 힘든데 여기 오면 라면도 끓여 먹고 과자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이 신부는 2021년 3월 '참 소중한…' 쉼터 문을 열고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민단체와 주 3회 150인분의 도시락을 나눠주고 있다.

'혼밥'이 일상인 주민들을 위해 다 같이 간식을 먹는 이벤트도 연다.

겨울에는 '어묵 데이', '떡볶이 데이'를, 여름에는 '콩국수 데이', '화채 데이'를 개최한다.

한파 속 고시촌 모여든 중년들…온기 전한 '어묵 한 그릇'
이 신부는 "청년은 젊다고, 노년은 나이가 많다고 사회에서 관심을 갖고 지원하지만 정작 우리 사회의 '허리'에 해당하는 중장년층은 외면하고 있다"며 쉼터 개소 계기를 밝혔다.

그는 "여기 온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 숨은 경우가 많지만, 병들고, 아프고, 가진 것 없다고 해서 우리끼리 재미있게 살지 말라는 법은 없잖느냐"고 웃었다.

서울시 주민등록통계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대학동에는 1만4천109세대가 있는데, 이 가운데 1인 가구가 9천718세대(68.9%)로 가장 많다.

이 신부는 이중 45%가량이 40∼60대고 대다수는 남성일 것이라고 했다.

이 신부는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쉼터를 찾는 사람들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며 "지난 추석에 선물 140명분을 준비했는데 하루 만에 모두 동나서, 내년부터는 150개를 준비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