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복도에 검은 옷차림의 여성이 등을 돌린 채 서 있다. 침묵과 신비감이 감도는 이 작품은 덴마크 화가 빌헬름 함메르쇠이의 '인테리어'(1905)다. 여성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을 응시하고 있지만, 그 방에 속하지 않는다. 방과 방 사이 애매한 공간에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다.
'인테리어' 빌헬름 함메르쇠이, 1905 /이른비 제공
'인테리어' 빌헬름 함메르쇠이, 1905 /이른비 제공
"그림 속의 여성들은 어디에 있는가." 최근 출간된 <꿈꾸는 방>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불편한 시선> 등의 저서에서 여성의 눈으로 미술사를 해설해온 이윤희 미술평론가의 신간이다. 요람부터 침실, 부엌, 거리와 일터까지 여성이 거쳐 가는 공간들을 중심으로 명화의 의미를 돌아본다.

부엌은 오랫동안 여성의 공간이었다. '요섹남'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성별에 따른 역할 구분이 완화됐지만, 여전히 부엌을 '금남 구역'으로 두는 문화권도 적지 않다. 이러한 풍조는 예술에도 반영됐다. 볼프강 하임바흐의 '창 뒤에 주방 하녀가 있는 아침 식탁'(1670)을 보면 '먹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나'는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창 뒤에 주방 하녀가 있는 아침 식탁' 볼프강 하임바흐, 캔버스에 유채 /이른비 제공
'창 뒤에 주방 하녀가 있는 아침 식탁' 볼프강 하임바흐, 캔버스에 유채 /이른비 제공
스페인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1618)는 부엌 그림의 정수를 보여준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마르다·마리아 자매의 일화를 그렸다. 예수가 집에 들자 언니 마르다는 식사를 준비했고, 동생 마리아는 예수의 말씀을 들었다. 혼자 부엌일 하는 것이 억울했던 마르다는 동생이 자신을 돕게 해줄 것을 청했다. 예수는 오히려 "왜 그렇게 걱정이 많으냐, 마리아는 좋은 일을 택했으니 그것을 빼앗지 마라"고 다그쳤다.

이 일화를 다룬 대부분 작품이 예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동생 마리아에 초점을 맞췄다. 집안일보다 예배가 우선이라는 당시 사회적 맥락을 따른 것이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달랐다. 부엌에 있던 언니 마르다의 뾰로통한 표정에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 또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싶지 않았겠나. 저자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배움과 부엌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것은 결국 두 사람 다 여성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디에고 벨라스케스, 1618, 패널에 유채 /이른비 제공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디에고 벨라스케스, 1618, 패널에 유채 /이른비 제공
책은 그림 속 여성들이 사회적 공간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살펴본다. 거리에 나선 여성들은 유혹과 위험에 직면했다.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베르제르 술집의 바'(1882) 속 여성 종업원 뒤편 거울에는 추근대는 남성 손님이 비춰 보인다. 파스텔톤 색감이 인상적인 에드가르 드가의 '발레, 스타'(1878)의 커튼 뒤에는 발레리나를 음흉하게 지켜보는 중년 신사가 숨어있다.

'꿈꾸는 방'이라는 책 제목은 '자기만의 방'을 향한 그림 속 여성들의 끊임없는 투쟁을 떠오르게 한다. 책이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작품은 정정엽의 '먼 길'(2020)다. '인테리어'의 여성이 비좁은 복도에 갇혀 있던 것과 달리, 여기서 여성은 드디어 탁 트인 바다와 육지 사이에 서 있다. '먼 길'이 걸려 자유로운 바다에 도착했다는 의미일까. 작품은 여러 생각을 남긴다.
'먼 길' 정정엽, 2020,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이른비 제공
'먼 길' 정정엽, 2020,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이른비 제공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