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의 종횡무진 경제사] "스탈린때 수백만명 굶어죽었다"…우크라 지옥으로 만든 '대기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터졌을 때 가장 속상했을 사람은 아마도 우크라이나 대통령이었을 것이다. 이전까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 뉴스에서 항상 ‘원톱’이었고 세계 각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등 그 자신도 록스타에 가까운 인기를 누렸다. 이제는 중동 전쟁에 밀려 단신으로 취급되거나 다른 뉴스 분량이 넘치면 그나마도 생략이다. 서러워라 잊힌다는 것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우크라이나인인 그는 작고 선한 나라 이미지로 조국을 포장하면서 푸틴을 세상에 더 없는 악당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국제 정치의 측면에서 보면 진짜 문제는 그분이다. 국민들에게 헛된 꿈을 불어넣었고(EU에 들어가네, NATO에 가입하네 등등인데 현실성은 별로 없다. 주변에 외교관이 있으면 물어보시라) 계속해서 러시아를 도발했다(때려봐, 때려봐). 조금 심하게 말해 ‘장군놀이’를 즐기는 그를 볼 때마다 대통령 역할은 그가 대통령으로 출연한 드라마에서 끝냈어야 모두에게 해피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그러나 현재 우크라이나의 고난은 그들이 90년 전에 겪었던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당시 우크라이나에는 두 종류의 부모가 있었다. 자기 살을 자식에게 양도한 부모와 자식의 살로 삶을 이어간 부모.
이 사람 덕분에 기아에 의한 살인이라는 의미의 홀로도모르(holodomor)라는 단어까지 생겼다. 참상이 사실이냐는 질문에 소련 당국은 기아 같은 건 없으며 다만 영양 부족 때문에 전염병이 번져 사망자가 많이 나오는 것이라고 대꾸했다. 사진은 지난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는 러시아 공산당 지지자.  /AP연합뉴스
이 사람 덕분에 기아에 의한 살인이라는 의미의 홀로도모르(holodomor)라는 단어까지 생겼다. 참상이 사실이냐는 질문에 소련 당국은 기아 같은 건 없으며 다만 영양 부족 때문에 전염병이 번져 사망자가 많이 나오는 것이라고 대꾸했다. 사진은 지난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는 러시아 공산당 지지자. /AP연합뉴스
인류 역사에는 모쪼록 사실이 아니었기를 바라는 사건들이 있다. 그중 압도적인 1위가 1933년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다(끝까지 읽고서 반박하실 사례를 드신다면 정말 고맙겠다). 레닌이 죽고 스탈린이 자리를 계승했을 때 그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로 자유 시장 경제를 뛰어넘고 말겠다는 신념을 완성한 상태였다.

방법은 간단했다. 농민에게 잉여농산물을 빼앗아 일부는 외국에 팔아 그 돈으로 기계를 수입하고 나머지로 노동자 계급의 배를 채워주는 방식이다. 그러나 소련의 토양은 그의 소망을 충족시켜줄 만큼 비옥하지 못했고 스탈린은 서쪽인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로 눈을 돌린다.

이런 농담 기억하실 거다. 우크라이나에 가면 김태희가 밭을 갈고 어쩌고 하는. 여기서 방점은 김태희가 아니라 ‘밭을 갈고’에 찍힌다. 대충만 지어도 대부분 풍년인 게 곡창지대 우크라이나의 옥토다. 천혜의 땅은 그러나 자신들이 관리할 때나 축복이다. 통제권이 타인에게 넘어가면 하늘이 내린 복은 재앙이 된다. 1931년 소련 전체의 곡식 징수 목표가 확정됐을 때 이를 가장 많이 할당받은 것은 우크라이나였고 비극이 시작된다.

반혁명 분자로 몰려 숙청당하지 않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공산당 간부들은 숫자 맞추기에 골몰했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다음 농작물 파종을 위해 따로 보관하는 종곡 창고를 턴 것이다. 봄에 파종을 못 했으니 당연히 가을 추수는 없었다. 굶는다와 죽는다 사이의 간극이 조금씩 좁혀지기 시작한다.

굶는 데 지친 한 농민은 스스로를 매장하기 위해 미리 파 놓은 자신의 묘지로 갔지만 거기에는 이미 다른 시체가 누워있었다. 농민은 또 다른 무덤을 팠고 몸을 뉘어 죽음을 기다렸다. 한 아버지는 입 하나 줄이겠다며 두 자식 중 한 명을 생매장하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돌아와 보니 다른 아이도 죽어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견딜 만하다. 천륜(天倫)이 흐트러지는 시간이 다가온다. 가족이 그중 가장 약한 개체를 잡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어머니는 자신과 딸의 식사를 위해 아들을 요리했다. 친척들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한 소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버지가 자기를 잡기 위해 칼을 가는 모습이었다. 1933년 6월 우크라이나의 한 여의사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아직은 식인종이 되지 않았어. 하지만 네가 이 편지를 볼 때쯤이면 어떨지 모르겠다.” 이 무렵 대거 발생한 고아는 대부분 자기 자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죽어간 부모들의 아이였다. 부모들의 유언은 끔찍과 절절 그사이 어디쯤이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 몸을 먹어라.” 거짓말 같은 이 이야기들은 모두 당시 국가 경찰 기구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제 ‘압도적 1위’라는 표현을 자신 있게 든 사례가 등장할 차례다. 한 마을에서는 식인종들로부터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아이들을 한곳에 모아 밖에서 자물쇠까지 채워 놓고 키웠다. 하루는 아이들이 조용하기에 들여다봤더니 아이들이 그중 가장 약하고 어린아이를 잡아먹고 있었다. 부모들을 경악하게 한 건 식량으로 선택된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이 자신의 찢긴 몸에서 쪽쪽 피를 빨아 먹는 동안 아이 역시 제 몸에서 떼어낸 살 조각을 우물우물 씹고 있었다.

이 모든 비극은 스탈린이 식량 수출을 몇 달만 중단하거나 무려 300만t에 달하는 비축 곡물을 풀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사태를 매우 독창적으로 해석했다. 사회주의가 성공하면 적들도 필사적으로 저항하기 마련이고 이들 우크라이나인은 사회주의를 혐오한 나머지 가족을 고의로 죽게 했다는 얘기다. 참사 소식을 서방으로 내보내 소련을 고립시키려는, 목숨을 바쳐 혁명적 낙관주의를 망치려 드는 인민의 적을 스탈린은 진심으로 증오했다. 그가 인간계 출신 악마인지 악마계 출신 ‘외래종’인지 헛갈리는 이유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당시의 식인 이야기를 쉬쉬하며 절대 입에 올리지 않는다.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