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을 경영하여
송순

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 세 칸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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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부자, 세상이 모두 내 집일세 [고두현의 아침 시편]
면앙정 송순(宋純,1493~1583)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시조에 뛰어났습니다. 문집으로 <기촌집> <면앙집>이 있고, ‘면앙정가(俛仰亭歌)’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지요.

이 시조 ‘십 년을 경영하여’에서 그는 초가집 한 채를 지어놓고 그 속에 세상을 다 들여놓았습니다. 내가 묵을 방 한 칸, 달이 들어올 방 한 칸, 거기에 청풍이 노닐 방 한 칸. 더 이상 들여놓을 데 없는 강산까지 병풍처럼 둘러놓고 보니 남부러운 것 없는 집입니다.

얼마나 여유로운가요. 덕분에 초가삼간은 천하를 품을 만큼 커다란 집, 우주(宇宙)의 집이 됐습니다.

욕심과 여유는 매우 다르지요. 욕심은 ‘마이너스 에너지’여서 남의 것을 빼앗아야만 채워집니다. 그래서 자신과 남을 다 같이 빈곤하게 만들죠. 그러나 여유는 ‘플러스 에너지’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게 아니라 그것을 공유함으로써 더 큰 풍요를 선사하지요.

그래서 욕심 많은 부자는 남의 곳간을 탐내고, 진정한 부자는 남의 곳간이 가득한 데서 기쁨을 느낍니다. 세상엔 부자가 많지만 이처럼 마음마저 풍요로운 부자는 드물지요.

척 피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집도 차도 없는 ‘가난뱅이’입니다. 시계도 몇만 원짜리를 차고 다니고 밥도 허름한 식당에서 먹습니다. 그러면서도 25년간 4조원이 넘는 돈을 남몰래 기부해왔습니다.

그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 ‘숨은 억만장자’입니다. 미국과 아일랜드, 베트남, 태국, 남아공, 쿠바 등 세계 곳곳의 질병 퇴치와 교육·인권을 위해 거액을 기부했지만 ‘비밀엄수’라는 조건을 달았죠.

그의 어린 시절은 정말 가난했습니다. 아일랜드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우산 장수, 카드 판매, 골프장 캐디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 하며 자랐습니다. 사회에 나와서도 고생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50년대 지중해 항구에서 미국 선원들에게 면세 술을 파는 일을 계기로 돈을 벌었고, 마침내 세계적인 소매 면세점 듀티프리쇼퍼스(DFS)를 창업해 ‘면세점 신화’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엄청난 돈을 모은 그는 1984년 자선재단을 세웠고, 부인과 자녀 몫으로 얼마간의 돈만 남기고는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부자란 과시나 허영을 멀리하며 검소하고 소박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앤드루 카네기의 가르침을 실행하면서 진정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지요.

“돈은 매력적이지만, 그 누구도 한꺼번에 두 켤레의 신발을 신을 수는 없다”는 그의 깨달음은 그래서 더욱 빛납니다. 그는 올해 10월 9일, 92세를 일기로 소형 임대아파트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부자들은 “돈을 벌기보다 쓰기가 더 어렵다”고 말합니다. 남에게 베풀면서 인생의 행복을 실현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습니다.

트레일러 주차장의 버스 안에서 자라 하버드 의대를 졸업한 후 전 세계의 가난한 지역에서 에이즈와 폐결핵에 맞서 평생을 의료 활동에 바치며 아이티와 르완다에 최초로 공중보건소를 세운 폴 파머 박사, 75년간 세탁소를 운영하며 근근이 모은 15만 달러를 흑인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미시시피대학에 기부한 오시올라 매카시, 학생들을 위해 5만7000㎡ 크기의 타이거 우즈 학습센터를 세운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 어린 양을 우간다의 한 마을에 보내 학생들의 자립을 도운 헤퍼 인터내셔널….

이들 크고 작은 ‘영웅’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는 ‘진짜 부자’들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뒤돌아볼 틈도 없이 일상의 아우토반에서 운전대만 꽉 잡고 속도에 집착하지요. 그것은 자신에 대한 집착일 뿐만 아니라 남보다 빨리 달리려는 욕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송순이 ‘십 년을 경영하여’ 얻은 교훈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욕심보다 세상을 품는 그릇이 얼마나 더 소중한지를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부자란 바로 이런 것이죠. 남을 위한 마음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듭니다. 자신을 위한 욕심으로는 큰 그릇을 절대로 채울 수 없지요.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