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문화의 정수' 금동대향로 발굴 주역들이 떠올린 30년 전 현장
스펀지로 물 빼내며 고군분투…"향로 연구, 공예·문화사 등 다각화해야"
"이상한 게 보여요"…어둠 뚫고 꽁꽁 언 손으로 찾은 백제 걸작
"자료를 정리하려고 사무실에 잠시 들렀는데 오후 4시쯤 전화가 왔어요.

'이상한 게 보입니다' 그 말에 바로 일어났죠."
김정완 전 국립대구박물관장은 30년 전 '그날'을 이렇게 떠올렸다.

당시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었던 그는 오전에는 발굴 조사 현장에 있다가 오후에는 사무실에 돌아와 조사 결과와 사진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곤 했다.

그러나 1993년 12월 12일 오후에 걸려 온 전화 한 통으로 박물관에는 비상이 걸렸다.

김 전 관장은 백제의 왕릉급 무덤이 모여있는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군(현재 부여 왕릉원) 서쪽 일대 조사 현장으로 향했고, 밤늦게까지 조사단원들과 작업을 벌였다.

"이상한 게 보여요"…어둠 뚫고 꽁꽁 언 손으로 찾은 백제 걸작
유난히도 추웠던 그날 밤, 기와 조각과 진흙을 걷어낸 뒤 모습을 드러낸 건 백제 금동대향로. 물결을 박차고 튀어 오르는 듯한 용 위로 펼쳐진 백제인의 이상향이었다.

김정완 전 관장은 "날은 어두워지고 (땅에) 물은 계속 흘러드는 터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물기를 스펀지로 적셔 빼내는 작업을 계속했다"고 떠올렸다.

그는 "평소라면 현장을 덮어두고 다음 날에 발굴조사를 이어갔겠지만 밤사이 물이 얼 수도 있어 꽁꽁 언 손을 옆구리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유물 수습에만 집중했다"고 덧붙였다.

"이상한 게 보여요"…어둠 뚫고 꽁꽁 언 손으로 찾은 백제 걸작
당시 학예연구사로서 현장을 지휘한 김종만 충청문화재연구원장은 "처음에는 둥그런 모습을 보고 부처님 머리 위에 올려지는 보관(寶冠)인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유물이 무엇이냐는 논의를 할 새도 없이 현장은 빠르게 돌아갔다.

오랜 기간 땅속에 묻혀 있었던 만큼 최대한 빨리, 또 안전하게 꺼내는 게 관건이었다.

서로 손전등을 비춰가며 유물의 모습을 온전히 확인한 때가 오후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고 한다.

"'이런 유물도 나오는구나' 생각했어요.

대학생 때부터 여러 발굴 조사에 참여해서 꽤 경험이 많았는데도, 정말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그런 발굴이었지요.

" (김종만 원장)
"이상한 게 보여요"…어둠 뚫고 꽁꽁 언 손으로 찾은 백제 걸작
훗날 '세상을 놀라게 한 발견'이라는 평가가 나왔지만, 사실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능산리 고분군이 있는 산자락 서쪽 비탈과 부여 나성(羅城) 사이에는 관람객 주차장이 들어설 예정이었으나, 공사에 앞서 진행한 조사에서는 이렇다 할 유물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 국립부여박물관장이었던 신광섭 전 백제문화제재단 대표이사는 "(향로가 출토된 일대는) 계단식 논이 있던 곳이지만, 예정부터 기와 유물 등이 여럿 나와 주시하던 곳"이었다고 설명했다.

시굴 조사로 허가를 받은 현장을 제대로 발굴해야 한다고 요구한 이가 신 전 관장이다.

"이상한 게 보여요"…어둠 뚫고 꽁꽁 언 손으로 찾은 백제 걸작
그는 "당시 '내가 징계받겠다'고 여러 차례 설득하면서 전면 발굴에 나섰다.

문화재관리국(현재의 문화재청)을 찾아가 '딱 한 번만 더 조사하게 해달라'고 거듭 요청했다"고 말했다.

"향로가 나오던 순간이 생생합니다.

손으로 하나하나 만져 가면서 종이컵을 넣어 물을 빼내고, 또 찾고, 반복이었죠. 엎드려서 2시간 넘게 그러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 (웃음)
30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백제 금동대향로를 어떻게 기억할까.

김종만 원장은 "향로 발굴은 박물관 인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된 일"이라며 "(높이가 61.8㎝에 이르는) 대형 향로를 섬세하게 만들 수 있는 나라가 백제였다는 점을 많은 이들이 알아줬으면 한다"고 했다.

김정완 전 관장은 능산리 절터 추가 조사에서 나온 국보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을 언급하며 "참여한 발굴 현장에서 국보 2점이 나왔다는 건 대단한 영광"이라고 말했다.

"이상한 게 보여요"…어둠 뚫고 꽁꽁 언 손으로 찾은 백제 걸작
그러나 백제 금동대향로를 둘러싼 수수께끼는 아직 풀리지 않은 부분이 많다.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석조사리감에는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을 뜻함)에 의해 567년 만들어졌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으나, 향로 제작과 관련한 정확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다.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재위 523∼554)의 넋을 기리는 용도로 제작했으리라는 게 학계의 추정이다.

향로가 백제의 독창적 유물이 맞는지, 능산리 절터의 공방지(공방 터)에서 발견된 이유는 무엇인지 등도 향후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부분이다.

"이상한 게 보여요"…어둠 뚫고 꽁꽁 언 손으로 찾은 백제 걸작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는 "지금까지 향로에 담긴 도상 등 향로 자체를 분석한 연구가 많았다면, 앞으로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금속 공예 전반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특히 "향로 연구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중국의 향로 유물, 일본의 백제계 (금속공예) 유물을 다각도로 봐야 한다"며 "향로가 탄생한 백제의 문화적 수준도 함께 밝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광섭 전 관장은 "금동대향로 발견은 우리 고대사의 자존심을 살려준 유물"이라며 "학술 연구뿐 아니라 이를 활용한 소설, 영화, 게임 등 다양한 콘텐츠 개발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