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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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은 소설 <변경>에서 1960년대 라면의 맛을 이렇게 서술했다. “노랗고 자잘한 기름기로 덮인 국물에 곱슬곱슬한 면발이 담겨 있었는데, 그 가운데 깨어 넣은 생계란이 또 예사 아닌 영양과 품위를 보증하는 음식.” 소설가 김훈은 2015년 발간한 산문집의 제목을 아예 <라면을 끓이며>로 짓고 자신의 라면 조리법을 소개했다.

세계라면협회에 따르면 한국인은 2021년 37억9000만 개의 라면을 먹었다. 아무리 거하게 삼겹살을 굽고 쌈된장과 함께 상추에 크게 한입 싸서 아래턱이 빠지도록 입을 벌려 먹어도, 입안을 개운하게 한다며 입가심용 라면을 끓인다.
오뚜기와 서울대 도예과가 협업해 개발한 면기들. /오뚜기 제공
오뚜기와 서울대 도예과가 협업해 개발한 면기들. /오뚜기 제공
하지만 다시 내가 찾는 맛은 변형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정석의 레시피 그대로 끓인 라면이다. 적당히 식은 촉촉한 면발을 흡입할 때 입안을 가득 채우는 충족감, 나아가 그릇에 입술을 대고 조금씩 뭉근하고 자극적인 국물을 목구멍으로 넘길 때 흐르는 전율을 온전히 느끼려면 퓨전 혹은 고급은 빈약한 신기루다.

라면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편안함과 마음 깊은 허기진 곳을 쓰다듬는 음식이라면, 공예가들이 만든 사물 역시 사람에게 행하는 태생의 본연과 역할이 같다. 나는 지난 10월 서울 북촌의 한옥촌 ‘행복작당2023’에 방문했다가 월(WOL)삼청에서 오뚜기가 서울대 도예과와 함께 개발한 면기 전시 ‘오뚜기잇2023’을 봤다. 오뚜기의 상징색인 노란색을 중심으로 식품을 지칭하는 ‘eat(잇)’과 식사 도구를 뜻하는 ‘it(잇)’에 ‘잇는다’는 의미가 합쳐진 행사였다.

23명의 프로젝트팀이 참여해 6개월간 개발한 면기와 테이블웨어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전시를 보면서 ‘나는 어떤 그릇에 라면을 담아 먹어볼까? 어떤 그릇이 색다른 추억과 식(食)의 만족감을 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라면 그릇은 아름다움도 있어야 하지만, 라면 그릇으로 충족시켜야 할 기능이 있다.

국물과 면의 조화를 이루는 것, 국물이 면에 스며들되 국물이 면의 맛과 식감을 해치지 않는 것. 빨리 식지 않는 보온력, 나아가 라면을 먹으며 소환 가능한 기억과 감정들, 한 그릇의 분식을 먹어도 초라해지지 않을 식사의 품격을 모두 충족한다면 좋은 라면 그릇이 아닐까?

나는 열효율이 좋아 빨리 끓고 가벼운 양은 냄비의 과학을 믿지만, 먹을 때는 나의 그릇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그릇을 선택해 옮겨 담는다. 혼자 먹어도 개인 플레이팅 매트를 깔고 좋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낸 후 받침까지 괸다. 곁들일 김치나 무절임도 작은 종지에 먹을 만큼 덜어 둔다. 왕후장상의 밥상은 아니지만 그리고 몇백원이면 마트에 가서 사고 3~4분이면 후다닥 끓일 공산품이지만 한 끼의 식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혼자 먹어도 덜 쓸쓸하게, 조금이라도 더 맛있게 먹을 요량으로 자신에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대접하는 ‘라면 한 그릇’이다.

홍지수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