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시인의 겨울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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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낭독회장에서 만난 눈빛들은
통창 밖 바다 노을보다 아름답고
이소연 시인
통창 밖 바다 노을보다 아름답고
이소연 시인
“엄마 지금 김장해. 바빠. 끊어봐.”
엄마의 겨울나기 시작은 김장이다. 소금으로 숨을 죽인 배추에선 단맛이 날 것이다. 단맛은 서리에서 온다는데, 냉랭한 엄마를 보니 김치 맛은 좋을 것 같다. 포항에 들렀다 올 수도 있었는데 여러 일정이 겹쳐 그러지 못했다. 엄마는 울산까지 와서 그냥 올라간다고 섭섭해하더니, 김장하느라 분주한 가운데 목소리에 생기가 돈다. 그나저나 김장해본 적 없는 나는 무엇으로 겨울나기를 준비하나.
지난주에 지역 신문사에 다녀왔다. 신춘문예의 계절, 시 부문 예심을 보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 서울역으로 향했다. KTX에 올라타 성에꽃 피는 새벽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데,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입에서 피는 훈김 때문에 찬 새벽의 공기 속으로 숨 냄새가 그려진다. 겨울이 오니까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있다.
쓰고 싶은 마음과 설렘. 그리고 기다림. 행운. 이 겨울을 보내고 맞이하는 첫봄에 읽게 될 시도 겨울 새벽처럼 내가 못 보던 것을 보게 해줄까? 기대에 부풀었다. 신문사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고 접수 번호가 매겨진 작품들을 읽어 나갔다. 한창 신춘문예에 투고하던 시절이 떠올라 한 편도 허투루 읽을 수 없었다.
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시 쓰는 일을 잠시 놨다가 결혼하고 나서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신춘문예를 준비했다.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1회 때 투고했는데 최종심에서 떨어졌다. 그때 당선자가 김기주 시인이었고, 당선작을 읽었을 때 너무 좋아서 낙선의 실망보다 좋은 시를 읽는 기쁨이 더 컸던 기억이 난다. “절간 소반 위에 놓여 있는/금이 간 화병에서/물이 새어 나온다/물을 더 부어 봐도/화병을 쥐고 흔들어 봐도/물은 천천히, 이게/꽃이 피는 속도라는 듯/조용하게 흘러나온다” ‘화병’이란 시의 도입부에서부터 나는 위로받았다. 어떤 일이든 억지로 되는 일은 없구나. 나는 아직 피지 않은 꽃의 속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14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2회 당선자가 됐다. 좋은 시는 나를 부정하는 일에 복무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떨어뜨리고 당선된 시인의 시 덕분에 나를 한없이 긍정할 수 있었고 믿어줄 수 있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시 읽기는 오후 세 시가 돼서야 끝이 났다. 나는 눈사람처럼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읽다 보면 누군지도 모르는 한 사람의 심상 속으로 미끄러졌고, 이내 슬퍼지곤 했다. 행간 속에 감춰둔 삶을 생각할 때면,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래서 좋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래서 좋은데, 심사를 위해서는 장점보다는 흠을 찾아야만 해서 시 읽기가 더욱 힘겨웠다. 1000여 편 가까이 되는 시를 읽고 기운이 쪽 빠져 신문사를 빠져나왔다.
다음 일정을 위해 정자해변에 있는 ‘카페소소 그리고 책’이란 책방으로 향했다. 작년 ‘거의 모든 기쁨’ 낭독회를 한 곳에서 올해는 친구 김은지 시인의 낭독회 사회를 보게 됐다. 그렇게 많은 시를 읽고 나서 또 낭독회라니 시인의 겨울나기답다. 낮은 지붕 너머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들어서는 동안 해풍이 나를 훑고 지나간다. 내 그림자가 먼저 바다에 빠진다.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바닷물, 몽돌은 햇빛을 머금었다가 뱉어놓기를 반복하는지 윤슬이 아름답다. 우리는 책방의 통유리를 등지고 앉아 사람들의 표정을 마음에 담았다. 낭독회가 끝나고 카페소소 그리고 책 대표님이 함께해준 사람들을 감탄에 차서 바라보며 물었다. “시 읽는 동안 노을 지는 거 봤어요?” 모두 너무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우리는 노을보다 아름다운 눈빛을 보느라 등 뒤에서 번지던 시간을 놓쳐 궁금했다. 겨울나기 좋은 궁금증이다.
엄마의 겨울나기 시작은 김장이다. 소금으로 숨을 죽인 배추에선 단맛이 날 것이다. 단맛은 서리에서 온다는데, 냉랭한 엄마를 보니 김치 맛은 좋을 것 같다. 포항에 들렀다 올 수도 있었는데 여러 일정이 겹쳐 그러지 못했다. 엄마는 울산까지 와서 그냥 올라간다고 섭섭해하더니, 김장하느라 분주한 가운데 목소리에 생기가 돈다. 그나저나 김장해본 적 없는 나는 무엇으로 겨울나기를 준비하나.
지난주에 지역 신문사에 다녀왔다. 신춘문예의 계절, 시 부문 예심을 보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 서울역으로 향했다. KTX에 올라타 성에꽃 피는 새벽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데,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입에서 피는 훈김 때문에 찬 새벽의 공기 속으로 숨 냄새가 그려진다. 겨울이 오니까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있다.
쓰고 싶은 마음과 설렘. 그리고 기다림. 행운. 이 겨울을 보내고 맞이하는 첫봄에 읽게 될 시도 겨울 새벽처럼 내가 못 보던 것을 보게 해줄까? 기대에 부풀었다. 신문사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고 접수 번호가 매겨진 작품들을 읽어 나갔다. 한창 신춘문예에 투고하던 시절이 떠올라 한 편도 허투루 읽을 수 없었다.
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시 쓰는 일을 잠시 놨다가 결혼하고 나서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신춘문예를 준비했다.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1회 때 투고했는데 최종심에서 떨어졌다. 그때 당선자가 김기주 시인이었고, 당선작을 읽었을 때 너무 좋아서 낙선의 실망보다 좋은 시를 읽는 기쁨이 더 컸던 기억이 난다. “절간 소반 위에 놓여 있는/금이 간 화병에서/물이 새어 나온다/물을 더 부어 봐도/화병을 쥐고 흔들어 봐도/물은 천천히, 이게/꽃이 피는 속도라는 듯/조용하게 흘러나온다” ‘화병’이란 시의 도입부에서부터 나는 위로받았다. 어떤 일이든 억지로 되는 일은 없구나. 나는 아직 피지 않은 꽃의 속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14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2회 당선자가 됐다. 좋은 시는 나를 부정하는 일에 복무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떨어뜨리고 당선된 시인의 시 덕분에 나를 한없이 긍정할 수 있었고 믿어줄 수 있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시 읽기는 오후 세 시가 돼서야 끝이 났다. 나는 눈사람처럼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읽다 보면 누군지도 모르는 한 사람의 심상 속으로 미끄러졌고, 이내 슬퍼지곤 했다. 행간 속에 감춰둔 삶을 생각할 때면,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래서 좋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래서 좋은데, 심사를 위해서는 장점보다는 흠을 찾아야만 해서 시 읽기가 더욱 힘겨웠다. 1000여 편 가까이 되는 시를 읽고 기운이 쪽 빠져 신문사를 빠져나왔다.
다음 일정을 위해 정자해변에 있는 ‘카페소소 그리고 책’이란 책방으로 향했다. 작년 ‘거의 모든 기쁨’ 낭독회를 한 곳에서 올해는 친구 김은지 시인의 낭독회 사회를 보게 됐다. 그렇게 많은 시를 읽고 나서 또 낭독회라니 시인의 겨울나기답다. 낮은 지붕 너머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들어서는 동안 해풍이 나를 훑고 지나간다. 내 그림자가 먼저 바다에 빠진다.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바닷물, 몽돌은 햇빛을 머금었다가 뱉어놓기를 반복하는지 윤슬이 아름답다. 우리는 책방의 통유리를 등지고 앉아 사람들의 표정을 마음에 담았다. 낭독회가 끝나고 카페소소 그리고 책 대표님이 함께해준 사람들을 감탄에 차서 바라보며 물었다. “시 읽는 동안 노을 지는 거 봤어요?” 모두 너무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우리는 노을보다 아름다운 눈빛을 보느라 등 뒤에서 번지던 시간을 놓쳐 궁금했다. 겨울나기 좋은 궁금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