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에 대한 1040쪽짜리 책을 내는 건 어떤 의미의 행동일까? 최근 국내 출간된 <행동>은 일단 두께로 압도하는 책이다. 1000쪽이 넘는 양장본은 일반적인 책의 3배 분량이다. 무게만 1.5kg에 달한다. 그야말로 인간 행동에 대한 모든 것을 담겠다는 포부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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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면면을 보면 수긍하게 된다. 책을 쓴 로버트 M. 새폴스키는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의 스트레스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스트레스가 뇌의 해마에 있는 신경세포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입증한 학자다. 하버드대에서 생물인류학을 전공한 뒤 록펠러대에서 신경내분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스탠퍼드대에서 생물학과 및 의과대학 신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신경과학자가 내놓은 두꺼운 책이라고 미리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제인 구달에 코미디언을 섞으면 새폴스키처럼 글을 쓸 것"이라는 '뉴욕타임스'의 평처럼 깊이 있으면서 재기발랄한 글쓰기를 보여준다. 신경과학 책이 술술 읽히는, 심지어 가끔은 피식거리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이마엽 겉질은 갑자기 차오른 생식 호르몬들에 푹 절어 있다. 그러니 청소년이 청소년처럼 행동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서문부터가 그렇다. "상상은 늘 이렇게 흘러간다"고 새폴스키의 상상이 시작된다. 이 상상은 정체불명 '그'의 비밀 벙커에 잠입하는 것. 액션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격투 묘사 문장들이 흘러가고, 상상은 새폴스키의 이같은 선언으로 끝을 맺으며 '그'의 정체를 밝힌다. "아돌프 히틀러.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죄로 너를 체포한다." 인간이 폭력적 상상을 하곤 한다는 것, 즉 인간이 폭력을 싫어하지 않다는 책의 핵심 논쟁점을 '인류 최악의 폭력을 저지른 히틀러에 대한 폭력'이라는 딜레마 상황을 통해 풀어낸 것이다.
일부 영장류는 암컷의 사회적 지배욕이 더 크고 공격적이다 [책마을]
책은 이처럼 인간 행동 중에서도 특히 폭력, 공격성, 경쟁에 주목한다. 특정 행동이 벌어지기 1초 전, 몇 분~며칠 전, 몇 달 전 등 줌렌즈를 뒤로 당기면서 점차 인간 행동의 궁극적 원인을 찾아나간다.

새폴스키는 신경생물학과 유전학, 사회학, 심리학 등 분과를 넘나들며 특정 행동의 원인을 분석한다. 잘못 퍼져 있는 사회 통념은 과학적 논박으로 바로잡는다. 흔히 테스토스테론, 즉 남성 포르몬이 폭력성의 원인이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인간을 포함해) 거세한 수컷이라고 공격성이 제거되지는 않는다. 미국 일부 주에서 사법 절차로 성범죄자에게 화학적 거세를 실시하지만, 재범을 막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한다. 영장류와 설치류 일부 종은 암컷이 수컷보다 사회적으로 지배적이고 더 공격적이다.

"공격성은 보통 테스토스테론보다 사회적 학습에 더 의존하는 일이고, 일반적으로는 테스토스테론 농도 차이가 누가 남들보다 더 공격적일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즉, '생물학적 남성'과 폭력성은 상관이 없고, 폭력성을 남자다운 특성으로 추켜세워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폭력성을 부추길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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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과학자가 추적한 폭력의 원인은 결국 '맥락'에 있다. '나쁜 행동'을 설명하려면 유전자나 호르몬을 확인해야 하는 게 아니라 성차별과 극심한 소득 격차 같은 맥락을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책은 "유전자는 필연성이 아니라 가능성과 취약성의 문제"라며 "유전자가 무언가를 단독으로 결정하는 일은 없다"고 강조한다.

"유전자의 영향은 환경에 따라 달라지고, 호르몬은 당신이 믿는 가치에 따라 당신을 더 착하게 만들 수도 있고 못되게 만들 수도 있으며, 우리는 '이기적'으로 진화하지도 '이타적'으로 진화하지도 다른 어떤 방향으로 진화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다만 특정 조건에서 특정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진화했다. 맥락, 맥락, 맥락이 전부다."

지속적 스트레스는 이런 맥락을 읽는 능력을 파괴시킨다. 스트레스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사람은 아이, 여성, 장애인 등 약자에게 화풀이해 스트레스를 줄이거나 이기적 행동에 빠져든다. 반대로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는 폭력을 억제한다.

책은 인간이 이타적 행동과 공감능력 역시 가능한 존재라는 데 주목한다. 미라이학살이 대표적 사례다. 베트남전이 진행 중이던 1968년 3월 16일. 한 미군 중대가 소위의 명령에 따라 미라이라는 마을에서 비무장 민간인을 공격했다. 그들은 아기와 노인도 포함해 비무장 민간인 350~500명을 죽였고, 시체를 훼손하고 우물에 처박았다. 이 끔찍한 학살을 멈추기 위해 총 든 동료들을 막아선 사람은 불과 25살의 휴 톰프슨 주니어 준위였다.

이 사례가 다소 교과서적으로 느껴진다면 1725년 출생한 영국성공회 사제 존 뉴턴은 어떨까.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곡한 걸로 유명한 뉴턴은 젊어서 노예선 선장이었다. 이 일을 그만둔 지 35년이나 지난 후에야 노예제를 비난하는 소책자를 냈다. 책은 말한다. "뉴턴이 더디게 휘청거리면서도 끝끝내 나아가서 도덕적 거인이 된 것을 볼 때, 어리석고 모순적이고 나약한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느낀다."

새폴스키는 이 책을 쓰게 된 개인적 계기에 대해 "나는 천성이 극도로 비관적"인데 아이가 생긴 이후 "세상이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찾아보았다"고 설명한다. 그는 책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과학과 연민 중 어느 한쪽만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없다."

새폴스키가 이 책을 쓴 건 탁월한 행동이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