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우아한 시대'는 끝났다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했다.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므로, 한 주일에 걸친 그의 방문은 온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그와 마오쩌둥의 정상회담은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품었다. 닉슨 스스로 자신의 방문을 “세계를 바꾼 한 주일(the week that changed the world)”이라 불렀고, 모두 그의 평가에 동의했다.

한국전쟁에서 치열하게 싸운 두 대국이 대화를 시작하면서 국제 정세는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1972년 9월엔 일본과 중국이 베이징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양국 사이의 관계를 정상화했다. 마침내 1979년 1월 미국을 방문한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과 지미 카터 대통령이 양국의 외교 관계 수립을 알리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런 관계 개선을 계기로 중국은 자유세계와의 교류와 교역에 참여했다.

그때까지도 중국은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유지했고 자급자족을 목표로 삼았다. 특히 농업이 집단화돼 농민들은 집단농장에서 일했다. 집단농장의 생산성은 아주 낮을 수밖에 없어서 농민들은 늘 굶주렸다. 1978년 안휘성의 작은 마을에서 농민들이 몰래 집단농장의 토지들을 배분해 경작했다. 당연히 소출이 올랐고, 이런 비밀 분배는 빠르게 퍼졌다. 물론 집단농장 관리들과 행정당국은 이런 시도를 억압했지만 자유화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농업 부문에서 일어난 경제 개혁은 다른 산업에도 퍼졌다.

외교적 개방과 경제적 자유화는 중국을 매력적 시장으로 만들었다. 풍부한 노동력과 낮은 임금 덕분에 중국은 빠르게 세계 제조업의 중심이 됐다. 그리고 중국 경제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발전했다.

중국의 이런 경제 발전은 온 세계에 큰 혜택을 줬다. 경제 발전은 본질적으로 비교 우위에 따른 분업과 교역에서 나온다. 중국이 세계 제조업의 중심이 되어가면서 비교 우위에 따른 합리적 분업이 세계적으로 이뤄져 세계 경제의 생산성을 지속적으로 높였다.

지난 40여 년은 정보 처리와 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세계가 실질적으로 하나의 시장이 되고, 관세는 점점 낮아지고, 외국 기업과 상품에 대한 차별이 줄어들어 시장 경제의 이점들이 국제적으로 충분히 구현된 시기였다. 이 시기에 기업가들은 비교 우위라는 절대적 원칙만을 따르면서 온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어 생산성을 한껏 높였다. 그 덕분에 온 세계에서, 특히 중국과 인도에서, 많은 사람이 가난에서 벗어났다.

세계 경제가 처음으로 맞은 이 ‘우아한 시대(Belle poque)’가 문득 끝났다(‘우아한 시대’는 원래 서유럽 극성기인 1870년대부터 1914년까지를 가리킨다). 이제 나라마다 보호무역으로 기울고 기업들은 위태로운 해외 공급망에 애를 먹는다. 이처럼 갑작스러운 파탄은 중국의 규칙 위반에서 나왔다. 법의 지배, 재산권, 지식재산권, 인권,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과 같은 자유 경제의 원칙을 중국은 모두 무너뜨렸다. 그런 행태는 중국이 객관적 도덕이 존재하지 않는 전체주의 사회라는 사정에서 나왔다.

중국이 결코 자유주의를 따르지 않으리라는 조짐은 오래전에 나왔다. 1989년의 톈안먼 사건은 중국 정권의 본질을 보여줬다. 그러나 모두 ‘자유로운 사회와의 교류는 중국을 바꿀 것’이라는 허망한 얘기를 앞세우면서 눈앞의 이익을 추구했다.

죽음을 앞두고 닉슨은 자신의 연설문 작성자 윌리엄 새파이어에게 탄식처럼 고백했다. “우리가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낸 것 같다.” 자주 인용되는 이 얘기는 세 가지 오류를 품었다. 프랑켄슈타인은 시체 조각들로 인조인간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괴물로 불린 인조인간은 이름이 없었다. 실은 그는 선량한 존재였고, 문제는 그를 포용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었다.

닉슨이 괴물에 비유한 중국은 자유세계가 1970년대 이후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전체주의 중국은 1940년대 말엽부터 존재했다. 자유세계가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서 짐짓 모른 체했을 따름이다. 이제 엄혹한 시대가 시작됐으니 우리 기업들도, 정부도 현실적 선택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