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전 유튜브 시대를 예측한 '원조 재벌집 막내아들' 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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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예술계 가장 위대한 인물, 미디어 아트의 아버지
백남준의 일대기를 다룬 최초의 영화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리뷰
한국계 어맨다 킴 감독, 5년간 추적한 아트 다큐
예술적 업적에 어린 시절부터 말년의 삶 다룬 기록영화
류이치 사카모토가 테마곡 작곡하고 스티븐 연 낭독
영향 주고 받은 '친구들'과 평론가 후원자 등 모두 출연
TV가 등장하자 인터넷과 유튜브 시대까지 예견
"혼란 속 영감을 찾고 끊임없이 혁신한 사람,
우린 아직까지 백남준을 따라잡지 못했다"
백남준의 일대기를 다룬 최초의 영화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리뷰
한국계 어맨다 킴 감독, 5년간 추적한 아트 다큐
예술적 업적에 어린 시절부터 말년의 삶 다룬 기록영화
류이치 사카모토가 테마곡 작곡하고 스티븐 연 낭독
영향 주고 받은 '친구들'과 평론가 후원자 등 모두 출연
TV가 등장하자 인터넷과 유튜브 시대까지 예견
"혼란 속 영감을 찾고 끊임없이 혁신한 사람,
우린 아직까지 백남준을 따라잡지 못했다"
“미래를 생각하는 건 예술가의 일이다. 난 예술가지만 예술엔 관심이 없다. 내 관심은 온 세상에 있다.”백남준이 살아 있다면 지금 91세. 20대 때부터 백남준은 인터넷을 넘어 개개인이 미디어가 되는 '유튜브 세상'을 예견했다. 무엇보다 장르를 넘나들며 세상과 대화했다. 위대한 철학자이자, 혁신을 거듭했던 실천가로 전 세계 미술계에서 지금까지 '읽고 또 읽어도 여전히 놀라운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백남준(1932~2006)을 다룬 최초의 기록 영화 '백남준 :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이런 백남준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렇다. '괴짜 예술가', '미디어아트의 창시자' 정도의 수식어 안에 그를 가두기에 그는 너무 큰 존재였다.
내달 6일 개봉하는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세 가지 이유에서 놀랍다. 세계 현대미술계의 흐름을 뒤바꾸고,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백남준에 관한 영화가 여태 없었다는 점, 그에 대한 기록이 이토록 생생하게 많이 남아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에게도 한 인간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아픔과 트라우마가 있었다는 점이다.
원조 '재벌집 막내아들'의 떠돌이 인생
백남준은 '재벌집 막내아들'의 원조격이다. 그가 태어난 1932년, 한국에 캐딜락 자동차가 두 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그의 집에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인 백낙승은 1920년대부터 방직기 1300여 대를 갖고 있는 태창방직을 운영했다. 서울 포목시장을 사실상 독점했고, 조선말 왕실의 상복과 제복 등도 도맡았다.백남준의 창신동 집은 1만㎡(약 3300평)에 달했고, 차 수리공만 10명이었다. 그의 집은 '큰 대문 집'이라 불렸다. 식민시대의 다른 사업가처럼 백남준의 아버지는 일본과 가까웠다. 어린 백남준은 그런 점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평생 부친과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우리 집은 부패한 가문이었어요."
백남준에게 자신의 아버지는 하나의 콤플렉스였다. 누구나 그의 부를 부러워했지만, 정작 백남준은 부끄러워 했다. 그래서 가족을 버리고, 외로운 길을 택했다. 아버지는 백남준을 '문제아'로 낙인 찍고 홍콩에 있는 영국계 고등학교로 전학을 보냈다. 도쿄대에서 미학을 전공한 그는 독일 현대음악의 거장 아르놀트 쇤베르크 음악으로 졸업 논문을 쓴 뒤 작곡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1956년 독일로 건너간다.
그는 가족들과는 담을 쌓았다. 한국을 떠난 뒤 34년 동안 고국 땅을 밟지 않았다. 영화 속 등장하는 지인들은 "그가 유명 가문의 후손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가난한 국가의 가난한 예술가 정도로만 알았다."고 했다. 왜 그립지 않았겠는가.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삶을 고국 밖에서 보냈다. 그래서 언제나 소통이 문제였다. 어떻게 해야 소통을 더 잘할 수 있을까."
백남준을 만든 위대한 친구들
백남준이 '고독한 괴짜'였다는 건 오해다. 그에겐 예술적 동지와 친구가 많았다. 미국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가 대표적이다. 작곡가로서의 삶에 회의를 느끼던 1958년, 그는 케이지의 공연을 보고 각성한다. 현대음악계의 이단아로 불리던 존 케이지는 선불교 사상을 음악에 접목하며 무대 위에서 즉흥적으로 작곡을 하거나, 악기를 부수고,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등의 실험을 했다. 그가 존경했던 쇤베르크가 클래식 음악의 조성을 넘어섰다면, 백남준이 스승이라 부르는 존 케이지는 음악을 파괴해 소음도 음악으로 끌어들인 사람이었다."독일에서 작곡가가 되겠다는 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나 다름 없었죠. 춥고 어두운 날이 반복됐어요. 존 케이지의 공연은 그런 나에게 구원과 같았습니다. 내 세상은 1958년부터 시작됐어요. 제게 1957년은 기원 전이나 다름 없죠."
백남준은 이후 피아노 등 악기를 톱으로 자르고 때려 부수는 퍼포먼스 '존 케이지를 위한 오마주'(1959), 먹물에 머리칼을 담가 머리로 그림을 그리는 '머리를 위한 선'(1961) 등을 내놓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평생 가족처럼 지냈다. 백남준의 인맥은 넓고 깊었다. 악기와 몸을 탐구한 시리즈들엔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이 함께 했다. 나체로 악기를 연주하고, 소형 TV를 속옷 대신 입는 등의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함께 했다.
백남준은 전 세계 20여 명의 아방가르드(전위) 예술가 그룹이 모인 플럭서스그룹을 만들었고, 이들 예술가들이 각자 실험적인 예술에 참여하는 운동 '글로벌 그루브'(1973)를 만드는가 하면,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 같은 글로벌 프로젝트도 함께 했다. 이 프로젝트는 백남준이 기획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을 통한 생중계 쇼였다. 미국 시간으로 1984년 1월 1일 정오에 시작한 만큼 한국시간으로 새벽 2시였는데도, 국내에서 680만 명이 지켜봤다.
"모두가 자신의 채널을 갖게 될 것"
백남준은 유복했던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평생 가난했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이었다. 집안의 어떤 재정적 도움을 받지 않은 것도 이유지만, 예술적으로 타협하지 않은 것도 가난의 원인이 됐다. 1960년대 미술시장에는 보이지 않는 서열이 있었다. 1위와 2위는 언제나 회화와 조각이었다. 사진조차 평가대상이 안됐으니, 비디오 아트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저 오락의 일부로 여겨졌다.그래서, 백남준은 가난했다. 후원 받은 10달러로 10일치 식량을 사야할 정도였다. 그래도 백남준은 회화나 조각으로 방향을 틀지 않았다. TV가 처음 나왔을 때, 그는 라디오를 떠올렸다. 최초의 보급형 라디오를 만든 게 히틀러였으니 말이다. 인간이 기계와 어떻게 공생할 지에 대한 미래를 그리던 백남준은 TV의 뒤를 뜯었다. 일방적인 TV의 소통 방식 대신 "나도 TV에 말을 걸어보겠다"는 시도였다. 첫 TV전시가 독일에서 혹평받은 뒤 그는 미국행을 결심한다. 1964년 'VIP 초청'으로 관광 비자를 겨우 따내 뉴욕으로 건너갔다. 당시 집주인이었던 빌 윌슨은 "TV 16대와 로봇 2대를 갖고 이사왔다. 매우 난감했다"고 했다. 피아노를 뜯고 부수고, 음악가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르는 행위예술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실제 그는 '수줍음이 많고 조용한 남자'였다고.
그에게 TV를 활용한 예술은 미래에 대한 예견이기도 했다. TV에 대고 소리를 질러보기도 하고, 자석을 갖다 대 화면을 일부러 변형시키는가 하면, TV를 여러 대 이어붙여 새로운 조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사카모토의 테마곡과 박서보 인터뷰까지
그가 창조한 미디어 아트의 세계는 지금 봐도 놀랍다. 이 영화를 극장 화면으로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93년 '미술 올림픽'으로 불리는 베니스 비엔날레의 독일관 대표로 참가해 유목민인 예술가라는 주제의 작업으로 '금메달'(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뒤 백남준은 세계가 인정하는 예술인이 됐다. 하지만 오랫동안 당뇨를 앓았던 그는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만다.하지만 몸의 일부가 마비된 마지막 10년 동안에도 백남준은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의자와 휠체어에 앉아 작품을 계속 만들었다. 늘 어린 아이처럼 웃으며 "내일은 다 나아서 예전처럼 작업할 거야"란 희망을 놓치 않았다.
평생 신문을 읽은 그는 예술은 물론 최신 기술과 마케팅, 주식시장 관련 정보에도 밝았다. "예술가라기보다 혁신가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그는 "진실보다 중요한 건 새로운 것이며, 아름다움보다 중요한 것도 새로운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영화는 그의 예술적 여정의 시간대별 연대기를 따른다. 뮌헨 뉴욕 서울 등을 오가며 20대부터 말년까지를 전부 담았다. 한국계 미국인 어맨다 킴은 5년간 자료를 모으고, 인터뷰하며 영화를 완성했다. 백남준이 직접 쓴 글들을 독백 형식으로 읽는 목소리는 평소 백남준의 팬이자 그의 가족과도 인연이 깊은 한국계 배우 스티븐 연이 맡았다.
이 영화의 메인 테마곡은 백남준과 친분이 두터웠던 고(故) 사카모토 류이치가 작곡했다. 에디트 데커 필립스(미술사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아티스트), 데이비드 로스(전 휘트니미술관장), 박서보 화백 등의 인터뷰가 반갑다. 영화의 부제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그가 다년간의 TV 실험 끝에 달의 일식 과정을 화면에 구현한 작품의 이름이다. 수 많은 부제의 후보 중 왜 이 제목이 선정됐는 지는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다.
의도적인 편집이나 특수 효과 대신 저해상도 자료와 고해상도 영상을 최적으로 편집해 이어 붙였다. 어쩌면 이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고도의 그래픽 작업이 필요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가 남긴 작품과 그의 삶 그 자체가 파괴적인 예술이었으니.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