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다음 영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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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한국이 싫어서>의 장건재 감독은 이른바 씨네필이다. 중학교 시절부터 하라는 공부 대신 시네마테크를 학교 삼아 고전 영화와 예술 영화를 섭렵하며 감독의 꿈을 키웠다. 최근에 장건재는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제목에서 감지 되듯 프랑스의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연출자 아네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1962)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는 암 검진 결과를 기다리기 전 타로를 보았다가 죽음이 닥쳤다는 운세를 받아 든 클레오(코린 마르샹)의 ‘5시부터 7시까지’의 여정을 거의 실시간으로 따라간다. 그 시간 동안 클레오가 하는 일은 별 게 아니다. 가수로 활동하는 클레오는 매니저를 커피숍에서 만나 타로 얘기를 전하고는 슬픈 티를 내더니만 모자 상점에 가 죽음을 의미하는 검은 모자를 구입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새로운 곡 연습을 한다.

하지만 집중하기 힘든 클레오는 검은 모자와 검은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와 정처 없이 파리 이곳저곳을 떠돈다.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누드모델로 활동하는 친구를 만나고 혼자 공원을 산책하던 중 곧 군대에 복귀하는 남자와 짧게 데이트를 즐긴다. 죽음이 멀지 않았다고 해서 무언가 특별한 행위를 할 것 같지만, 클레오는 그동안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두 시간’을 보낸다.
출처 = 다음 영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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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형식의 핵심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어도 두 시간 동안을 실제 시간처럼 다뤄 관객에게 ‘현재성 現在性’을 제공하는 데 있다. 극 중 인물에게 이입해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하는 것인데 죽음이 임박했다는 신호는 역으로 삶을 향한 욕망을 더 강하게 하고, 삶에 대한 의미 부여에 집착하도록 한다. 말하자면, 암에 걸렸다고 걱정한 순간부터 클레오에게 이 세상은 삶과 죽음, 그러니까 흑백과 같은 이분법으로 감지될 뿐이다.

클레오의 시선을 반영하듯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는 흑백 화면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흑백의 영상은 클레오가 바라보는 세상의 형태일 뿐 아니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의 반영이기도 하다. 흑백은 대개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차분하다는 인상을 준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이 세상과 안녕을 고하는 것도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클레오는 암 선고를 받고 나서도 그동안 살아온 대로의 일상을 유지한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그것이 마치 최선의 행동이듯 말이다.

‘일상 日常’의 핵심은 반복이다. 매일 반복되는 보통의 일, 즉 일상은 살아있기에 가능한 가치이다. 거듭해서 되풀이하는 행위일지라도 계속 움직인다는 것인데 두 시간 내내 가만히 있지 못하는 클레오의 일상은 그래서 이 영화의 중요한 소재다. 그에 맞춰 이동하는 카메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드러낼 뿐 아니라 살아있다는 운동성의 가치를 증명하는 미쟝센으로써 의미가 있다. 클레오의 시선에 맞춰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에서 눈에 띄는 건 죽음을 초월한 예술의 가치와 죽음과 등을 맞댄 삶의 표상이다.

출처 = 다음 영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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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가 집에서 기르는 새끼 고양이들은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존재들로 그 자체로 삶의 에너지가 오라를 두르고 있다. 클레오가 찾아가는 누드모델 친구의 나체는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이면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맨몸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의 작품을 통해 예술의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있다. 죽음이 표시된 타로로 시작한다고 해도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의 아네스 바르다는 죽음이 어떻게 생명을 얻고 어둠이 어떻게 빛으로 변환되며 삶이 어떻게 예술로 승화하는지를 보여준다.
출처 = 다음 영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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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이 있어야 백이 있고, 어둠이 있어야 빛이 존재하듯, 죽음은 삶과 떼어놓을 수 없다는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진리는 원의 이미지로 환원이 가능하다. 세상이란 게 그렇다. 우리 모두 맞닿아 있기 때문에 세상은 원을 그리며 순환한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와 장건재가 재해석한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도 영화로 이어진 관계의 원을 형성한다. 흑백으로 일관하는 아네스 바르다와 다르게 마지막 순간, 컬러로 변환되는 장건재의 작품은 결말에서 다른 결을 보이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같다. 그 어떤 누구의 삶도 하찮지 않고 죽음도 결코 끝이 아니다.

허남웅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