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미국을 방문한 주미공사 외교관들,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이하영 대감이다.
1888년 미국을 방문한 주미공사 외교관들,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이하영 대감이다.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창업한 이하영 대감에 대해 들어보셨는가? 중림동에 고무신 공장이 있었다는 것도 생소한 이야기일 텐데…이하영 대감? 그런데 우리 근대사에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도 흔치 않다. 그의 인생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권율 장군의 사위, 경주이씨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의 10대손이다. 같은 항렬의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선생은 조선이 멸망할 때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만주로 떠났다. 이회영 선생의 동생인 이시영 선생은 임시정부 요원으로, 귀국 후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이하영의 족적은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 이회영 선생과는 많이 다르다. 이하영은 부산 초량에서 떡 장사를 하다 큰 돈을 벌어 볼 요량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지만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해 알거지가 된다. 간신히 돌아오는 배삯을 마련했는데, 배 안에서 인생의 은인을 만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이다. 알렌은 조선의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로 부임하기 위해 배를 탔다. 두 사람은 1858년생 동갑내기로 이 때가 고종 21년, 1884년이었다.
왼쪽 :이하영에게 영어를 가르친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의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 / 오른쪽 : 대륙고무(주)를 설립한 이하영 대감
왼쪽 :이하영에게 영어를 가르친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의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 / 오른쪽 : 대륙고무(주)를 설립한 이하영 대감
1858년은 무슨 해(年)일까?

60세가 넘은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들이 '1958년생 개띠'들이다. 이들은 한국전쟁 이후 출생한 베이비부머 첫 세대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온몸으로 겪은 시대의 증인들이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일백년 전, 1858년생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1858년생 동갑내기 말띠인 이하영과 알렌, 이들은 이후 조선에서 거칠 것 없이 화려한 인생을 펼치게 된다.

알렌은 오갈 데 없는 이하영을 요리사로 채용했고 이하영은 알렌의 입이 되어 주었다. 이하영은 알렌에게 영어를 배웠고 갑신정변 후 민영익을 치료하며 고종의 신임을 얻은 알렌의 천거로 고종의 영어 통역관이 되었다. 이하영이 어떤 영어를 구사했는지, 그가 한 요리를 알렌이 먹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 남지만 그는 일약 외아문 주사가 되었다.

1888년 박정양이 주미공사로 갈 때 2등서기관이 되어 1등서기관 이완용, 이상재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 간다. 떡 장수가 외교관이 돼 미국 공사관에 근무하게 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영어의 힘은 대단하다. 고종은 떠나는 그에게 밀명을 하달한다. 미국에서 200만 불의 돈을 빌리라는 것이었다. 미국 선박이 부산, 원산, 인천항에 들어올 때 내야하는 무역 관세 명목으로 빌려 미국 군인 20만 명을 데리고 돌아오라는 황당무계한 밀지였다.

이 내용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으나 이하영 본인이 쓴 '한미국교와 해아사건'(신민, 1926년 6월호)의 내용이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청나라가 자신들의 허가 없이 미국에 외교관을 파견한 것에 대해 트집 잡았다.

주미 공사 박정양과 함께 간 이상재, 이완용은 청나라의 압력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졸지에 혼자 남은 이하영이 미국 공사 대리가 된다. 그는 뉴욕은행에서 100만불을 무역 관세 명목으로 먼저 차입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이하영은 그 돈을 물 쓰듯이 쓰며 워싱턴 밤거리의 황제로 군림한다. 얼마나 허세를 부리고 돈을 펑펑 써댔는지, 미국 외교가에서 백인 미녀에게 청혼을 받을 정도였다.

상투 튼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고 수염을 기른 동양의 외교관에게 미국의 미녀들이 정신이 나간 것이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어 계산을 해보니 100만 불 중 16만 불을 탕진했다. 이 일을 어찌 할까 고민하다 올 것이 왔다. 은행장을 대동한 미국 외교관의 호출이었다.

"미군을 파견하는 문제를 상원에서 협의했는데 부결되어 미안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사용한 16만 불은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운 좋게도 일이 너무 잘 풀렸다.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탄탄대로를 걷는다. 한성판윤을 비롯, 중앙관아의 핵심 인물로 뜬다.

망해가는 조선에서는 어떻게 처신하느냐가 출세의 관건이었다. 1904년에는 그 잘하는 영어 실력으로 외무대신에 올랐다. 1905년, 표면상 을사늑약을 반대해 을사오적에는 이름이 없다. 합병 후에는 중추원 고문, 일제의 귀족 작위를 받았고 은사금도 두둑이 챙겼다.

윤치호의 일기에 따르면 그가 얼마나 무식한지 한문으로 된 문서 하나 제대로 작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천지를 둘러보아도 이 사람만큼 출세하고,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 없다. 그는 시류를 잘 탔고 배짱이 두둑했던 것 같다. 알렌을 만나 영어를 익혀 권력의 정상 언저리까지 갈 수 있었고 나라가 망한 후에는 시류를 잘 읽어 갑부가 되었다.

그가 원효로에 대륙고무신을 세운 해는 1919년이다. 그는 자신을 아꼈던 고종의 승하도, 백성들이 궐기한 3.1운동도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고무신 사업이 자리를 잡자 1932년 공장을 세워 중림동으로 이사했다. 시대를 잘 읽은 이하영 대감의 전성기는 이곳에서 정점을 맞이했다. 중림종합사회복지관, 이 자리이다. 이곳에 로또 판매점이 있었다면 1등 당첨이 확실하다.
2009년까지 중립종합사회복지관 자리에 있었던 대륙고무공장 전경
2009년까지 중립종합사회복지관 자리에 있었던 대륙고무공장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