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영화 속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이 관객 여러분께 불쾌감을 드릴 수도 있음을 알립니다.”1) 로버트 베번, 『집단기억의 파괴』, 나현영 옮김, 알마, 2012, 103쪽.

2001년 영화 「A. I.」가 개봉했을 때 런던의 한 상영관에 나붙었던 공지라고 한다. 세계인이 익히 아는 뉴욕의 그 스카이라인을 산산 조각낸 그해 9월의 사건은, 영화 속 장면 하나가 불특정 다수 관객의 트라우마를 플래시백할 수 있음을 사전 고지해야 했을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모두가 기억하는 장면, 다 같이 경험한 충격과 고통, ‘집단기억의 파괴’.

하지만 얼마 전 내가 저 문장을 읽으며 떠올린 건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날의 스카이라인이 아니라, 아랍의 폐허였다. 이미 파괴돼버린 곳도 계속 파괴될 수 있다는 걸 알아서, 스크린이 아닌 폐쇄회로 화면을 보고도 동요가 없는 거냐고 묻는 말 같았다.

팔레스타인 갈릴리에서 태어난 아다니아 쉬블리의 소설 『사소한 일』은 그 황폐한 흙빛 풍경을 연상케 하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신기루만 빼고는. 광활하게 펼쳐진 황량한 언덕들이 신기루의 무게에 눌린 채 (…) 도대체 아무것도 없었다.”(9)

반세기 넘게 폭력이 정당화돼온 땅에 더 무엇이 있었을까. 팔레스타인 억압이 더 이상 민족이나 종교 대립이 아니라, “모든 차이를 억압의 기제로 전환시키는 사고방식과 그런 태도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체제”(158)임을 역설하는 소설은, 대재앙(‘나크바’)이 된 이스라엘 점령기 한 여성의 수난을 1부, 이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그다음 세대 여성의 의식을 2부로 하여 세대를 초월하는 폭력의 표면화와 내재화를 ‘비극과 소극’이라는 운명 공동체로 대비시킨다. 특히 두 번째 여성이 포화와 참상에 대해 갖는 거리감은 섬뜩할 만큼 가변적이고 경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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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옆 건물이 폭격을 당했을 때, 그 건물 안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던 청년 셋이 살해됐다는 사실보다도 폭격 때문에 책상에 떨어진 먼지에 더 신경을 쓰는”(88) 성향. “폭발음은 폭발이 얼마나 가깝고 먼 곳에서 일어나느냐에 따라 아주 다르게 들린다”(142)는 증언. “이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143)는 예감. “전신으로 마비가 번져”(155) 나가는 순간의 영원함…….

이 거리감을 문제 삼는 목소리에 대해, 저자는 “염소도 다른 염소가 도살장에 끌려갈 때 그것을 알아차리는데, 사람이 그걸 못한다는 말인가?”(166)라고 항변했다. 작품은 1부 여성의 피해를 고발하기보다는, 2부 여성의 삶에 그것이 어떻게 출몰하는가를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폭력의 참혹성을 모르지 않지만, 알고도 어찌할 바를 몰라서 현재는 과거에 사로잡힌다.

아다니아 쉬블리는 『사소한 일』로 2021년 부커상과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2005년부터 지난달까지 몇 차례 한국을 방문했을 정도로 우리 문학계와 교류도 활발한 편이다. 하지만 국내에 소개된 단독 저서는 『사소한 일』이 유일하다. 그래서 아쉽다는 게 아니라, 그래서 반가웠다. 어떤 작품은 저자가 확실해도 독자가 불확실해서 기획하지 못한다. 내가 자주 이용하는 서점에서 ‘팔레스타인’을 검색하면 5페이지의 검색 결과가 나오는데, 3페이지부터는 절판 도서다. 하지만 절판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비서구권 저자, 탈식민주의 작가들은 편집자를 여러 딜레마에서 놓여나게 해준다.
『사소한 일』의 번역 저본인 영어판 Minor Detail 표지
『사소한 일』의 번역 저본인 영어판 Minor Detail 표지
1) 로버트 베번, 『집단기억의 파괴』, 나현영 옮김, 알마, 2012, 1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