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민생'이 가을 낙엽 신세 돼서야…
“선거에서 그럴듯한 슬로건 하나 만들어 내면 절반은 이긴 것이다.” 6선을 한 홍사덕 전 의원이 생전 기자에게 한 말이다. 슬로건은 단순해야 하고, 학력·이념·빈부에 관계없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어야 하며, 이성적인 생각이 스며들 틈새를 주지 않을 정도로 무비판적 수용이 가능하도록 감성적이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게 선거전략가들의 분석이다. 국민의 귀를 잡아챈 상대의 정치적 구호를 반박하기 위해 수십 장의 문서와 수십 마디의 말을 동원해야 한다면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이런 취지에 딱 들어맞는 정치 슬로건으로 ‘민생’만 한 것이 없다. 국민의 생활과 생계를 챙기겠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단어는 우리 정치판에서 이리저리 뒹구는 가을 낙엽 신세가 돼 버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표 당선 연설에서 “첫째도, 둘째도, 마지막도 민생”이라고 했다. 검찰에 출두하면서까지 “이재명을 죽여도 민생 살리십시오”라고 했다. 어제 민생경제 회복을 위한다며 3조원 규모 금리 인하 프로그램, 지역화폐 예산 증액, 청년교통비 부담 경감 등을 제안했다. 내년 총선용 선심성이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도 민생을 부쩍 강조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나부터 민생 현장을 파고들겠다”며 연일 관련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책상에만 앉아 있지 말라”고 지시하면서 장관과 참모들도 바빠졌다. 민생 현장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한다며 ‘은행 종노릇’ 발언을 했고, ‘카카오 약탈’ ‘은행 갑질’ 비판도 이어졌다.

이쯤에서 무엇이 진정한 민생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억강부약 대동세상’을 외치며 이념형 선동적 법안들을 쏟아내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나라 재정이야 어떻게 되든 퍼주고 나눠줄 궁리만 하며, 부자 대 서민 갈라치기로 다수의 표를 얻으려는 것이 진정한 민생일 수는 없다. 시장에 가서 국수를 먹고 서민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민생 과업의 종착지로 여겨서도 안 될 것이다. 노동·공공·구조개혁 등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려 나라 경제를 튼튼히 하는 근본적인 일은 놔두고 아무리 민생이라고 외쳐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