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서울 고덕동 라이트룸 서울에서 열린 미디어프리뷰에서 상영되고 있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 /뉴스1
지난달 30일 서울 고덕동 라이트룸 서울에서 열린 미디어프리뷰에서 상영되고 있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 /뉴스1
“제가 그림을 그린 지 벌써 60년이 됐습니다. 나는 여전히 그림을 그립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아직도 이 일을 무척이나 즐기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미술 거장’으로 불리는 데이비드 호크니(86)의 목소리와 함께 가로 18.5m, 세로 26m, 높이 12m의 전시장 전체가 50분의 상영시간 내내 시시각각 모습을 바꾼다. 작품을 그리는 호크니의 손, 그에 따라 호크니의 그림 속에서 꽃을 피우듯 모습을 드러내는 식물들, 오케스트라 음악의 리듬에 맞춰 색을 바꾸는 휘황찬란한 조명…. ‘지금이 감동받을 시간’이라고 부채질하려는 제작 의도가 선명하게 느껴지지만, 호크니의 팬이라면 도저히 감동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가 인생 말년의 3년을 쏟아 만든 작품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호크니가 제작한 몰입형 미디어아트 작품 ‘데이비드 호크니: 비거 앤드 클로저(Bigger & Closer)’가 지난 1일 서울 고덕동 ‘라이트룸 서울’에서 막을 올렸다. 이 작품은 평생 회화와 드로잉, 사진 콜라주, 아이패드 그림 등 새로운 형식을 끊임없이 시도해온 호크니의 또 다른 도전이다. 서울은 지난 2월 영국 런던에서 첫선을 보인 이 작품의 첫 해외 행선지. 여러모로 낯선 이 전시의 막전막후, 작품을 즐기는 방법을 리처드 슬래니 라이트룸 런던 최고경영자(CEO)에게 들어봤다.

호크니가 직접 기획·내레이션 참여

한국경제신문과 단독 인터뷰한 라이트룸 런던의 리처드 슬래니 CEO.
한국경제신문과 단독 인터뷰한 라이트룸 런던의 리처드 슬래니 CEO.
이때까지 나왔던 몰입형 전시 대부분은 작고한 거장의 작품으로 만든 일종의 미디어아트였다. 이런 작품은 작가의 손이 닿지 않은 건 물론 승인조차 얻지 못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팬아트’나 다름없다. 상당수 미술 평론가가 몰입형 전시를 “거장의 이름을 내걸고 만든 공허한 모조품”이라고 비판하는 이유다. 반면 이번에 공개된 호크니의 작품은 생존 작가가 직접 제작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슬래니는 “2019년 새로운 형식의 몰입형 전시를 구현해보자고 생각하자마자 호크니가 떠올랐다”고 했다. 여러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세계적인 미술 거장, 게다가 86세의 고령에도 태블릿PC로 그림을 그릴 만큼 디지털과 친한 그야말로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만들 적임자라는 판단에서였다. 이메일을 보내자 곧바로 호크니에게서 답장이 왔다.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시죠.”
호크니가 20분의 1로 축소된 모형을 사용해 작업을 감독하고 있다(왼쪽). 모형에 상영되는 작품의 실제 모습. /David Hockney Photo credit Mark Grimmer·라이트룸 서울  제공
호크니가 20분의 1로 축소된 모형을 사용해 작업을 감독하고 있다(왼쪽). 모형에 상영되는 작품의 실제 모습. /David Hockney Photo credit Mark Grimmer·라이트룸 서울 제공
몰입형 전시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색을 원하는 규모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호크니는 흔쾌히 작품 제작을 수락했다. 그리고 3년에 걸친 대장정이 시작됐다. 코로나19 사태로 직접 만나기 어려워졌을 때에도 호크니와 라이트룸 측은 20분의 1로 축소한 스튜디오 모형과 화상 채팅을 통해 소통하며 작업을 이어갔다.

“호크니 본인의 내레이션과 애니메이션은 물론 아주 작은 요소들까지 모두 호크니의 손길이 닿았습니다. 개관 4개월 전부터는 호크니가 하루도 빠짐없이 공사 중인 전시장을 방문해 하루 8~10시간 마무리 작업을 했어요.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죠. 우리 쪽에서 ‘전시장 공사를 마무리해야 하니 적당히 하시라’고 말렸을 정도입니다.”

6개 주제로 구성된 전시는 기존 명작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완성된 작품은 새로운 형태의 ‘신작’이라는 게 호크니와 슬래니의 설명이다. ‘작품 장르가 뭐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기존의 장르 구분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미디어아트, 다큐멘터리, 영화 혹은 호크니가 직접 작품을 설명한다는 점에서는 팟캐스트의 요소도 있죠. 돌아다니며 감상할 수 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글쎄요, 직접 정해주시겠어요? 하하.”

어떻게 보나요? “마음대로 보세요”

호크니의 'Bigger & Closer'가 상영 중인 장면. 에트나컴퍼니 제공
호크니의 'Bigger & Closer'가 상영 중인 장면. 에트나컴퍼니 제공
평가는 엇갈린다. 서구 미술 평론가들의 반응은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다. 이때까지 몰입형 전시에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내온 영향이 크다. “잘 만든 다큐멘터리지만, 정통 미술과 거리가 멀다”는 반응이 대표적이다. 반면 대중은 열광했다.

“호크니는 자신의 작품에 스스로 굉장히 만족했어요. 몇몇 부정적인 비평도 ‘그들의 자유’라며 그냥 웃어넘겼죠.”

관람 방법을 묻자 “자유롭게 보면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슬래니는 자기 앞에 놓인 작은 플라스틱 페트병 생수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어느 날 호크니와 식사하는데 갑자기 앞에 놓인 페트병을 바라보더군요. 그리고 그 페트병의 주름이 어떻게 돼 있는지, 그 모습이 바닥에 어떻게 그림자를 만드는지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호크니는 그런 사람입니다. 무엇이든 관심을 갖고 자신의 방식으로 들여다보는 행위, 그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죠. 이번 전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든 자신만의 방식으로 즐겁게 보면 됩니다.”

런던 전시에선 스케치북을 갖고 와 그림을 그리며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할머니 할아버지 손을 잡고 아이가 함께 와 이야기를 나누며 보는 일도 다반사. 여러 번 와서 보는 ‘N차 관람객’도 눈에 자주 띄었다. “저도 500번은 넘게 본 것 같아요(웃음). 그런데도 볼 때마다 조금씩 못 봤던 것들이 보입니다. 그게 호크니라는 거장의 위대함 아닐까요.”

아쉬운 접근성, 하지만 호크니 팬이라면

라이트룸 서울 외부 전경. 에트나컴퍼니 제공
라이트룸 서울 외부 전경. 에트나컴퍼니 제공
라이트룸 서울의 시설은 ‘본점’ 영국 런던과 거의 동일하다. 고품질 영상을 위해 4K 프로젝터 14대, 2K 프로젝터 13대 등 총 27대의 프로젝터를 구비했다. 면적 대비 국내 최대 수량, 최고 사양이다. 1500개가 넘는 스피커는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구형(球形) 공연장 ‘스피어’와 같은 시스템을 적용해 오케스트라 음악과 거장의 목소리를 동시에 깨끗하게 재생한다.

그럼에도 선뜻 추천하기에 망설여지는 요소가 있다. 가장 큰 진입장벽은 위치. 고덕역에서 차나 택시를 이용해야만 한다. 가격은 성인 기준 평일 2만7000원, 주말 3만원이다. 런던에서 열리는 똑같은 전시에 비하면 30%가량 저렴하고 청소년과 어린이에게 적잖은 할인 혜택이 있지만 부담이 될 수 있다. 다만 이는 작품의 장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겠다. 슬래니는 “영화와 비교하면 다소 비싸지만 콘서트나 클래식공연에 비하면 훨씬 저렴하다”며 “연속해서 원하는 만큼 관람이 가능하다는 점도 감안해달라”고 했다. 전시는 내년 5월 31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