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플라워 킬링 문'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팔순이 넘은 노장이 또 하나의 수작을 탄생시켰다. 1920년대 오세이지족 연쇄살인사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플라워 킬링 문’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오래된 카피를 다시 떠올리게 할 만큼 흥미진진하면서 날카롭기까지 하다. 1967년에 첫 장편으로 데뷔한 이후, 마틴 스코세이지는 2-3년마다 신작을 내놓았지만 한 번도 ‘평작’이라 부를 만한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관객들 사이에 호불호가 있었을지언정, 그의 영화는 항상 문법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었고, 장르영화로서 매력적이었으며, 세상에 대한 확고한 시각과 강렬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었다.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2019)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을 때 그에게 ‘great’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존경심을 드러낸 것은 겉치레가 아니다. 설사 봉준호 감독이 언급하지 않았다 해도, 마틴 스코세이지는 정말 위대한 감독이기 때문이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많은 감독들이 그렇듯 그에게도 소위 ‘페르소나’라 불리는 배우가 둘 있다. 한 명은 70년대부터 꾸준히 함께 작업해온 로버트 드 니로이고, 다른 한 명은 ‘갱스 오브 뉴욕’(2002)으로 인연을 맺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다. ‘플라워 킬링 문’에는 이 두 사람이 함께 출연했는데, 디카프리오와는 여섯 번째 작업이다. 세계적으로 주목받아왔던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와 큰 인연이 없었던 스코세이지처럼, 디카프리오도 여러 번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음에도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결국, ‘레버넌트’(2015)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지만, 많은 평자들은 그보다 앞서 스코세이지와 합작한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로 수상했었어야 한다고 말한다. 스코세이지의 영화 중 가장 블랙코미디적 성향이 강한 이 영화는 디카프리오의 열연에 힘입어 탄생할 수 있었던 걸작이다.

주식 중개인으로 일하던 조던 벨포트는 뉴욕 증시가 대폭락하던 1987년, ‘블랙 먼데이’ 사태로 실직자가 된다. 이후, 그는 개인 투자자들에게 페니 주식 매매를 알선하는 소규모 투자자문사에서 일하게 된다. 조던은 화려한 언변술을 앞세워 수수료를 짭짤하게 챙겼고, 친구들과 투자자문사를 차려 더욱 막대한 수익을 올린다. 문제는 전쟁터 같은 업계에서 살아남으려면 극도의 긴장감과 압박감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조던과 그의 친구들이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목으로 술과 섹스, 마약에까지 빠져드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돈이다. 마약보다 더 강한 흡입력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돈의 달콤한 맛 때문에 조던은 월스트리트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밤마다 광란의 파티를 벌이고, 약에 취했다가 다시 아침을 맞는 일과를 반복한다. 스콜세이지는 이런 방식으로 마약과 돈이 같은 속성을 지녔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4900만 달러(약 560억원)를 벌고도 만족하지 못했던 조던은 점점 더 대범하게 주식 사기 및 자금 세탁 등의 범죄를 저지르다 결국 FBI에 덜미가 잡혀 대가를 치르게 된다.

돈과 마약을 연결시킨 것처럼, 스코세이지는 주식중개인과 뉴욕 뒷골목의 조직폭력배도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묘사한다. 사실, 겉모습만 번지르르할 뿐 온갖 감언이설로 절박한 투자자들을 설득해 그들의 등골을 빼먹는 조던의 사업은 건달들의 행태 그대로다. ‘좋은 친구들’(1990), ‘갱스 오브 뉴욕’(2003), ‘디파티드’(2006) 등을 통해 꾸준히 조직 세계의 폭력성과 비인간성을 이야기해왔던 스코세이지는 월스트리트로 공간을 옮겨서도 변함없는 그의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세계를 날 것 그대로 거칠게 담아내기는 하지만, 스코세이지는 누구보다 휴머니즘에 대한 모범적인 답안을 갖고 예술에 접근하는 감독이다.
그 감독 연출, 그 배우 연기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지휘자와 연주자로서 감독과 배우들의 호흡이 환상적인 영화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조던 벨포트의 파란만장한 하루하루를 체화해내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망가진다. 애초에 이 영화의 연출을 스코세이지에게 제안했던 것도 그였는데, 배우든 감독이든 창의성을 극도로 발휘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이유에서였다. 스코세이지의 영화들 중 가장 빠른 속도로 난잡하고 더럽고 웃기면서 냉소적인 장면들을 쏟아내는 이 영화가 성공적으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안목이 높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배우의 덕분이기도 하다. 개성파 배우, 조나 힐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잠깐의 등장만으로 영화 전체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매튜 맥커너히의 연기도 명불허전이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주식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국내에서도 종종 마약사범들의 뉴스를 접할 수 있는 요즘, 다시 꺼내보기 좋은 영화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