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 칼럼] 축구 한·중전 복사판 같은 양국 관계
경기장 이름부터가 위압적이다. 아시안게임 축구경기장 중국 항저우 황룽(黃龍) 스타디움. 황금 용이 상징하는 것은 중국 황제다. 중국과의 8강전,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5만 명 관중 사이에선 야유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쟁 중인 국가와 경기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무례하진 않았을 것이다.

중국 축구 팬들의 반한 악감정을 역지사지한다 치면, 몇 해 전 해프닝 하나가 기폭제 역할을 했을 거다. 중국 청두시 축구협회 주최의 한국 뉴질랜드 태국 중국 4개국 18세 이하 판다컵 청소년축구대회. 한국이 3전 전승 우승, 중국이 무득점 전패의 망신을 당한 가운데 우리 선수들의 우승 세리머니 중 주장이 트로피에 발을 올려놓은 사진이 돌면서 사달이 났다. 주최 측은 중국의 국보 격인 판다를 짓밟았다면서 우승 트로피를 회수하고, FIFA 고발까지 들먹이며 협박했다.

한국 선수단 전원이 기자회견장에서 90도 허리 굽힌 것은 물론 이 일 하나로 무려 네 차례나 공식 사과했다. 10대 선수가 무슨 딴 맘이 있어서 그런 포즈를 취했겠나. 그저 외국 유명 선수들의 숱한 SNS 사진을 따라 폼 한번 잡았을 뿐인데 말이다. 그런데도 중국 축구계는 어린 선수의 철없는 행동을 국격 모독으로 트집 잡아 화풀이하고, 한국 축구계는 속절없이 머리만 숙였다. 그땐 나라 간 분위기도 그랬다. 2019년 5~6월의 일이다.

대국인 양 하면서 소인배만도 못한 옹졸함,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호전성, 안하무인의 오만불손. 모든 중국인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중국 당국이 공공연히 내비치는 이런 기질은 세계인들로 하여금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고 있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얼마 전 발표한 전 세계 24개국 3만 명 대상의 설문 결과를 보면 일본 호주 스웨덴 미국 캐나다 등은 중국에 대한 비호감도가 80%를 넘었고, 한국 역시 77%로 2015년(37%)에 비해 8년 새 두 배 이상으로 높아졌다. 중국이 세계 평화·안정에 기여하지 않고(71%), 타국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으며(76%), 내정에 간섭한다(57%)는 등 부정적 인식이 역대 최고치다.

한·중 관계는 1992년 수교 이후 최악인 반면 한·미 관계는 1980년 이후 가장 우호적이다. 한국인 의식 조사를 보면 우리 국민의 80~90%가 한·미 동맹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 여론이 있기에 한·미 동맹을 넘어 한·미·일 협력 관계를 역사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캠프 데이비드 회동이 가능했다.

이제는 중국이 유화 제스처를 쓰고 있다.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참석한 한덕수 국무총리를 만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문재인 정부가 그토록 원하던 방한 가능성을 내비쳤다고 한다. 중국을 겨냥해 정례 합동군사훈련까지 예고한 한·미·일 삼각 안보 체제의 가장 약한 고리인 한국을 흔들 요량인 듯하다.

우리는 중국이 내민 손을 매정하게 뿌리칠 위치에 있지 못하다. 그렇다고 마냥 덥석 잡아선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 맺기에서 중요한 것은 호시절에도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는 냉정함과 평정심이다. 중국은 이른바 무력 현상 변경이라는 대만 유사시에 한국이 미국 편에 서는 것을 가장 의식한다. 한국은 미국의 아시아 지역 내 항공 정보 자산의 핵심 기지라는 지정학적 위상을 갖고 있다. 시 주석의 한·중 관계 중시 정책 요구도 그런 의미다.

중국의 이번 경제 위기는 중국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신호탄으로 보는 시각이 적잖다. 혁신 없이 요소 투입에 의존하는 국가주의 성장 모델이 한계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베이징대 석사 학위자가 대학 구내식당 주방에 취직하는 청년 실업 문제는 미래 폭탄이 될 수 있다. 미국의 저명 국제 정치학자 마이클 베클리·할 브랜즈 교수가 제기한 벼랑 끝에 몰린 강대국이 무력 사용을 불사한다는 ‘위험 구간(danger zone)’에 진입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결국 지금까지도 거칠었던 중국이 더 거칠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아시안게임 축구 중국전은 ‘전랑(戰狼)’ 중국을 상대하는 원칙을 재확인해줬다. 자신감, 철저한 준비, 그리고 극강의 실력 차. 자유민주주의 체제 우월성에 대한 확신과 핵심 산업 초격차 유지를 위한 지속적 투자다. 축구처럼 외교·안보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한·미 동맹을 넘어 일본 호주 인도 유럽연합(EU) 등 동맹의 동맹들과도 협력을 강화하고, 경제의 지평은 더 넓혀가는 ‘안동경세(安同經世)’의 디리스킹 지혜가 절실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