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戰·미중 갈등에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 중 4개국 불참
"지정학 문제 해결할 무대 아냐" 유엔 약화에 G20 등 대안 부상
신냉전에 발목잡힌 유엔 총회 '헛바퀴'…"아무것도 할 수 없어"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개최 중인 제78차 유엔총회가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갈등 등으로 인한 '신냉전' 기류 속에서 무기력한 상태에 빠졌다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가 19일(현지시간) 진단했다.

통상 유엔총회가 열리면 전세계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열띤 논쟁을 벌이곤 했으나, 올해에는 시급한 글로벌 현안이 산적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확연히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단면이 바로 이날 진행되는 유엔총회의 '하이라이트' 일반토의에서 드러난 각국 정상의 저조한 출석률이다.

특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 중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제외하고 4개국 정상이 참석하지 않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불참할 것이 어느 정도 예상된 바이지만, 영국과 프랑스마저 얼굴을 비치지 않는 것은 의외라는 평가다.

FT는 "리시 수낵 영국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부재는 안보리가 더이상 지정학적 문제를 해결할 최고의 무대가 아니라는 느낌을 강하게 보여준다"고 짚었다.

미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의 매튜 크로닉은 "이것이야말로 이 기구의 가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라며 "각국 지도자가 이곳에 와서 공개 연설을 하곤 하지만, 결국 아무 일도 성사되지는 않는 장소"라고 말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나 주요 7개국(G7) 등 같은 생각을 가진 강대국들로 구성된 국제기구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만큼 제대로 기능하지만, 신냉전 기류 속에서 여러 적대적 강대국을 한데 모아놓은 유엔 같은 기구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주요 20개국(G20)의 경우 좋은 토론의 장이 될 수 있으나, 구속력을 갖는 규정이나 각국의 결의를 수행할 집행부도 없다는 점에서 유엔을 대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FT는 이같은 현상이 단순히 유엔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작동 방식에 중대한 변화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외교가에선 동서간 냉전이 한창이던 1970∼80년대를 제외하면 이런 교착 상태가 거의 없었다는 분석이 나온다는 것이다.

서방국들은 안보리 논의를 마비시키려는 러시아의 움직임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FT는 전했다.

이제껏 시민사회가 안보리 토론에 접근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던 러시아가 최근 들어서는 '서방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자극했다'고 주장하는 록그룹 핑크플로이드의 로저 워터스 같은 인물을 연사로 초대하곤 한다는 것이다.

한 익명의 서방 외교관은 "러시아는 자질이 부족한 연사나 음모론자들을 불러 안보리의 토론 수준을 저하하기도 한다"며 "우리를 녹초로 만들고, 안보리의 입지를 더 약화하려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FT는 "안보리가 더욱 세계의 현안을 잘 반영할 수 있도록 1945년 부여된 5개 상임이사국 지위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미국은 G20이나 미국·인도·일본·호주 4개국 협의체인 쿼드(Quad), 미국·영국·호주 삼각 안보동맹인 오커스(AUKUS) 등 새로운 다자협의 틀을 육성해오고 있다.

유엔 주재 영국대사를 지낸 제러미 그린스톡은 유엔이 앞서 희미해져 간 국제기구의 운명을 따라갈 수 있다면서도 "유엔은 약해졌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여전히 엄청나게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린스톡은 "집단주의 정신이 다시 살아나야만 한다"며 "유엔이 일할 곳이 G20이 될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